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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모명성황후

홍릉

1897년(고종34년) 11월 21일 연도를 가득 메운 백성들은 추위속에서도 흩어지지않고 통곡과 슥픔속에 명성황후의 마지막길을 지켜보고있다 - 홍릉이미지
1895년 8월 20일 아침, 명성황후를 시해한 칼의 피가 채 마르기도 전에 대원군과 미우라공사는 건청궁 장안당(長安堂)에서 공포에 떨고 있는 고종과 만났다. 이들은 이번 변란이 궁중을 숙청하고 국무의 책임을 정하여 갑오개혁 이래의 정책을 올바르게 시행하기 위함이었다고 밝히면서 앞으로 대원군이 임금을 보익하여 궁중을 감독하고 정무의 책임은 내각이 맡을 것이라고 고종에게 알렸다. 이날로 친일파들이 대거 기용된 내각이 구성되었다. 22일에는 명성황후의 페서인 조칙이 발표되었으나 23일에 왕세자의 효성과 정리를 특별히 생각하여 폐후 민씨의 빈호(嬪號)만은 복위한다는 내각의 발표가 뒤 따랐다. 한편 고종을 알현하고 나온 각국 공사들은 이번 사건에 대한 다음과 같은 의견을 공동으로 발표했다.
  • 지난 20일 사변의 진상에 관하여 각국 사신들이 들은 바에 의하면 조선정부가 말하는 내용과 다르다.
  • 그러므로 변란의 수모자 등을 가려내서 엄벌에 처하기를 바란다.
  • 명성황후의 폐위조칙은 고종에 의사에 의한 것이라고 인정할 수 없다
홍릉 이미지 이어 미국과 러시아 공사는 인천에 있던 각기 20명 안팎의 육전대를 입경시켰다. 당황한 일본은 27일 고무라(小村壽郞太)를 필두로 한 조사반원을 조선에 파견하였고 29일 미우라공사의 귀국을 명령하는 동시에 혐의자 48명을 일본으로 소환하여 조사를 시작했다. (일본은 9월 9일 미우라 등 4명을 흉도소집 및 모살혐의로 구속했다가 춘생문(春生門) 사건이 일어나자 1896년 1월 21일 흉도 48명 전원에게 증거불충분의 이유로 면소처분을 내려 전원 석방 했다) 그러나 조선정세는 이런 정도의 조치로 가라앉지 않았다. 조선에 주재하고 있는 구미열강의 공사들도 조선의 친일내각을 불신하고 있었다. 이를 감지한 일본은 구미열강과의 타협을 모색하고 친일내각의 붕괴를 막기 위해 9월 11일 자진해서 일본군을 철수시킬 것과 조선정부에 간섭하지 않을 것임을 미·영·러·독·불 등의 공사들에게 알리고 9월 13일 훈련대의 해산을 내각을 통해 발표케 했다. 일본이 수그러드는 기미를 보이자 고종은 10월 10일 명성황후 위호(位號)) 복위의 조칙을 내리고 지난번 사변에서 훈련대는 무죄임을 선표 하여 훈련대 해산을 반대한 조선군인들이 대원군을 앞세워 명성황후를 시해한 것처럼 호도하려던 일본의 음모를 분쇄했다. 명성황후의 복위는 러시아 공사 웨베르를 비롯한 각국 공사들의 협력에 힘입은 바가 컸으므로 고종은 수십명의 외국 공사와 영사, 그리고 정부의 각료 등을 궁중에 불러 모은 자리에서 복위조칙을 선포하였다.
명성황후 시신의 운구준비 이미지 15일에는 명성황후의 시해사실을 백성에게 알리면서 국상을 정식으로 반포하였다. 이후 조선은 단발령, 전국적인 의병봉기, 아관파천 등으로 걷잡을 수 없이 떠밀려 가게 된다. 이런 저런 사정으로 미루어 오던 명성황후의 국장이 다시 논의된 것은 1896년 (丙申 建陽 1 고정33) 9월 이었다.(1896년 1월 1일 부터 양력이 사용되었다) 9월 25일 총호사로 임명된 조병세는 장지를 선정하기 위해 여러 곳에 지관을 파견했다. 1897년 1월 6일 의정부는 명성황후의 시호를 문성(文成), 능호를 홍릉(洪陵), 전호를 경효(景孝)로 정했다. (명성황후의 시호 는 3월 2일 명지(明智)와 성덕(成德)에서 따온 明成으로 개칭되었다) 장지는 청량리로 선정되었다. 명성황후의 유해는 시해직후 경험많은 늙은 환관에 의해 추려져 태원전(太元殿)에 이빈(移殯) 하였다가 1896년 7월 경운궁의 경효전에 모셔두었다. 국장은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에서 환궁한 뒤에 거행키로 했다. 1897년 2월 20일 고종이 경운궁(고종이 순종에게 양위한 뒤 궁호를 덕수(德壽)라고 정했으므로 경운궁에 나중에 덕수궁이란 칭호로 바뀌게 된다)으로 환궁하였으나 복잡한 국내정세로 국장은 다시 연기되었다. 1896년 7월 2일 결성된 독립협의회의 간청을 받아들인 고종은 10월 3일 칭제(稱帝)할 것을 선포하고 10월 11일 국호를 대한제국(大韓帝國)으로 결정했다. 12월 원구단을 쌓아 하늘에 제사를 드리고 황제즉위식을 거행했다. 이날 왕후는 황후로 왕태자는 황태자로 개칭되었다. 황제즉위식이 끝나자 국장준비는 빠르게 진전되었다. 28일 국장 당일에 쓰일 1천 1백쌍의 등롱이 도로연변에 걸리고 30일에는 경무사 이봉의가 산흥행렬의 총책임자로 내부대신 남정철이 국장날 응접을 맡기로 결정되었다. 11월 8일 국장도감제조에 김규홍, 산릉도감제조에 이정로가 임명되었다. 한성판윤 이채연과 양주군수 임원호는 산릉의 토목공사를 감독하였다.
명성황후 안산1897 1897년(고종34) 11월 21일 오전 11시, 마침내 명성황후의 유해는 유택인 홍릉을 향해 인화문(仁化門)을 나섰다. 수많은 명정과 홍전등을 앞세우고 1개 대대의 친위대가 선두에 섰으며 상여뒤에는 황제와 황태자가 36명이 메는 가마를 타고 뒤따르고 1백여명의 외국사신, 3백여명의 당상관, 3천여명의 군인들과 전국 각지에서 상경한 지방관 들이 줄지어 뒤를 이었다. 국장행렬은 여사군 (與士軍)과 빈객수만도 2만명이 넘었는데 길이가 무려 30리에 뻗쳤다 한다. 행렬의 선두가 종로와 동대문을 지나 청량리 임시 행재소에 거의 다다를 무렵인 오후 2시경 명성황후의 죽음을 애도하는 듯 맑게 개였던 하늘이 천둥과 함께 비를 뿌렸다. 연도를 가득 메운 백성들은 추위속에서도 흩어지지 않고 통곡과 슬픔속에 명성황후의 마지막 길을 지켜보고 있었다.(고종이 승하한 뒤 명성황후는 고종과 함께 [경기도 남양주시 홍유릉로(금곡동)] 금곡(金谷)으로 옮겨져 묻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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