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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모명성황후

임오군란과 근대화

용산 선혜창의 별창 이미지 개항이후 일본은 조선에 소비성 상품을 내다팔고 곡식과 원료를 사가면서 막대한 이익을 챙겼다. 일본상인들도 쌀 1섬에 40전에서 45전의 싼값에 산 뒤 일본에서 6원에서 8원에 팔아 엄청난 이익을 남기고 있었는데 이로인해 많은 양의 쌀이 일본으로 빠져나가게 되자 조선에서는 쌀이 부족하게 되었다. 자연 쌀값이 치솟아 백성은 더욱 궁핍하게 되었고 게다가 큰 흉년이 들어 민심이 흉흉했다. 국가의 재정은 바닥이 났고 이를 보충하기 위해 백성은 이중삼중의 조세를 부담해야 했으나 지방관리들의 착복과 횡령 등으로 국가의 조세수입은 오히려 줄어들었다. 때문에 중앙관리들에게는 6년동안 녹봉을 주지 못했고 구식군인들에게도 13개월분의 급료를 지급하지 못했다.
임오군란 당시 명성황후의 피난지였던 매괴여상 이미지 1882년(고종19) 6월 5일 아침 선혜청으로부터 한달분의 급료를 지급한다는 통보를 받고 도봉소 문전으로 무위, 장어 두영에 소속된 구식 군인들이 모여들었다. 창고문이 열리고 봉미가 지급되었는데 태반이 물에 불어 썩은 쌀이었거나 돌이 섞여 있었으며 정량마저 모자랐다. 분노한 군인들이 쌀을 나누어 주던 고지기를 구타했고 충돌한 군관들에 의해 김춘영, 유복만 등이 체포되었다. 이들의 구명을 위해 무위대장 이경하(李景夏)가 써준 석방청원 편지를 들고 민겸호의 저택을 찾은 구식군인들은 민겸호의 하인들과 실랑이 끝에 하인들을 때려 죽이고 가구와 집기들을 부숴버렸다. 사태가 심각해지자 군인들은 대원군에게 도움을 청하였다. 대원군을 만난 이후에 이들은 무장을 하게 되었고 계획적으로 움직이게 되었다. 조정은 이경하를 파면하고 이재면을 임명하는 한편 선혜청 당상 민겸호와 도봉소 당상 심순택을 파면하였으나 사태를 수습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민씨들의 저택을 부수고 서대문 밖 경기감영을 습격하고 일본공사관을 불태우면서 숫자가 크게 불어난 군인들은 6월 10일 새벽 창덕궁으로 쳐들어갔다. 목표는 명성황후였다. 임금의 급명을 받고 대원군이 입궐했다. 뒤이어 부대부인 민씨도 사인교를 타고 들어왔다. 평범한 궁녀의 옷으로 변복한 명성황후는 부대부인의 도움으로 사인교 속에 숨었다. 난군중에 정의길 등이 사인교의 휘장을 찢고 명성황후의 머리채를 잡아 밖으로 끌어냈는데 아무도 왕비를 본적이 없으므로 알아보지 못했다. 이때 무예별감 홍재희(洪在羲:나중에 啓薰으로 개명)가 「이 여자는 내 누이 홍상궁이니 오인하지 말라」며 명성황후를 업고 창덕궁을 빠져나왔다. 창덕궁을 탈출한 명성황후는 화개동에 있는 전 사어(司禦) 윤태준의 집에 피신하였다가 이날 밤으로 동대문을 벗어나 정릉쪽에서 아침을 맞았다. 날이 밝자 전 승지 조충희가 말을 팔아 바친 돈으로 가마를 세낸 뒤 중랑천을 건너고 망우리 고개를 넘어 한강나룻터에 이르렀는데 민응식과 민긍식, 윤제익, 이용익 등이 배행했다. 배삯은 명성황후가 끼고 있던 반지로 충당했다. 강을 건넌 일행은 양평에 안씨집에서 하루 쉬고 여주 민영위(閔泳緯)의 집에 숨었다가 장호원(長湖院:지금의 충북 음성군 감곡면 왕장리)에 있는 민응식(閔應植)의 집에서 환궁할 때까지 머물렀다. 얼마전까지 명성황후의 생가를 소유하고 있었던 민경진(46. 여주시 능현동)씨는 할머니로부터 임오군란때 피난 내려온 명성황후가 능현동에서 1주일정도 머물렀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한다. 임오군란중에 민경호, 김보현, 이최응, 일본교관 호리모도 등이 살해되고 민치상, 민영익, 김홍집의 저택 등 40여채가 파괴되거나 불탔다. 고종은 입궐한 대원군에게 사태수습에 전권을 위임하고 대소의 공무를 모두 대원군에게 품결(稟決)하라는 전교를 내렸다. 대원군은 「왕비께서 10일 오시(午時)경에 난군중에 이미 승하하신바 다만 그 체백(體魄:시신)을 찾지 못하고 있으니 모든 군졸들은 퇴산하라」는 내용의 교지를 선포케하여 국상(國喪)을 공식화하고 군인들을 해산시켰다. 대원군은 통리기무아문을 폐지하여 3군부를 부활시켰고 무위영 대신 훈련도감을 다시 세웠다. 민씨 친족과 친일세력이 숙청되고 대원군 측근들이 등용되었다. 그러나 6월 29일 임오군란 중에 입은 피해 보상을 요구하며 일본군대가 인천에 상륙했고 7월 7일에는 일본공사 하나부사가 2개 중대병력의 호위를 받으며 거만하게 임금을 알현했다. 청나라는 이번 군란과 중재역을 자임하면서 7월7일 4천명의 병력을 남양만 마산포로 보냈다. 이어 7월 21일 병력을 동대문 밖 동묘에까지 진출시켰다. 일본과 청나라의 무력앞에서 대원군도 속수무책이었다. 청나라와의 무력충돌을 꺼린 일본이 중재를 요청하자 청나라는 조선의 보호자 행세를 하면서 완강히 저항하는 대원군을 7월 13일 납치하여 청나라의 보정부(保定府)에 유폐시켜 버렸다. 대원군이 다시 실각하고 임오군란 발발이후 50여일만인 8월 1일 장호원에 있던 명성황후는 영의정 이하 대신들과 청군의 호위를 받으며 창덕궁으로 되돌아 왔으나 조선은 조금씩 외세에 의해 허물어 지고 있었다.
창설 당시의 이화학당 건물 이미지 임오군란이 끝난 뒤인 1882년 10월2일 고종은 춘당대(春塘臺)에서 청군과 일본군을 사열했다. 조선은 빠르게 변모하고 있었던 것이다. 조정에도 새로운 세력들이 등장했고, 이들은 서로 갈등을 일으키고 있었다. 청나라를 배경으로 점진적 개화를 모색하던 민씨일파 및 보수세력들의 사대당과 일본의 원조를 얻어 전면적인 개혁을 주장하는 김옥균(金玉均) 중심의 개화당이 그들이다. 1884년 9월 때마침 안남(安南) 문제로 청불전쟁이 일어나자 개화당은 청나라가 당분간 조선에 관심을 갖지 못하리라는 상황판단을 하게 되었다. 10월12일 임금의 부름을 받게되어 입궐한 김옥균은 국내외 정황의 위급함을 알리고 사대당이 저지른 폐단을 낱낱이 고하여 고종과 명성황후의 일시적인 신임을 얻는다. 고종은 이 자리에서「무릇 나라의 대계와 위급한 때를 당하여 경의 주모(籌謨)에 일임하겠다」는 친필 밀칙을 내려주었고 명성황후는 술상까지 차려주었다. 임금의 신임 위에 일본의 적극적인 협조내락을 받아낸 개화당은 1884년(고종21) 10월17일 우정국 낙성식 축하연을 기회로 정변을 일으켰다. 10월 18일엔 경우궁(景祐宮)에서 새 내각을 조직하고 14개조의 혁신정책을 발표했다. 그러나 10월 19일 창덕궁(昌德宮)에서 청일 양국 병사들의 전투가 벌어졌다. 세에 밀린 일본병사들이 퇴각하면서 사대당 요인들을 암살하여 한때 성공한 것처럼 보였던 갑신정변(甲申政變)은 3일만에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갑신정변 때 제시된 14개조의 개혁 정령 이미지 갑신정변이후 청나라의 간섭이 심해지자 조선은 통상조약체결로 가까워진 러시아에 기울어지게되었다. 이럴즈음 조선이 러시아에게 영흥항 용익권을 인정해주려 하다는 소문이 돌자 영국은 1885년(고종22) 3월 1일 거문도(巨文島)를 무단점령, 견제에 나섰고 청나라는 조선의 친러정권을 누르기 위해 대원군을 석방하여 8월27일 한양에 입경시겼다. 그러나 명성황후의 관심은 세계최강을 자처하는 러시아에 있었다. 1886년(고종23) 7월 10일 러시아 공사 웨베르에게 러시아의 보호를 요청하는 국서가 전달되었고 이 조·러 밀약에 자극받은 원세개(袁世凱)는 고종과 명성황후를 폐하고 대원군의 장손 이준용(李埈鎔)을 추대하기 위한 계획을 꾸민뒤 천진의 이홍장에게 파병을 요청하기도 했다.
1887년(고종24) 9월 28일 주영·독·러·이·불 겸임공사 조신희(趙臣熙)가 임지로 출발하고 11월 26일 주미공사 박정양(朴定陽)이 워싱턴에 도착했다. 전권공사 파견을 통해 외교의 자주권을 확립하려는 고종과 명성황후는 청나라가 내세운 영약 3단을 무시하고 박정양으로 하여금 단독으로 미국대통령 클리브랜드에게 국서를 전달하게 했다.
알렌 부부 이미지 영약 3단이란 첫째 조선공사는 임지에 도착하는 대로 그곳의 청나라 공사관에 먼저 보고 하고 청나라 공사와 함께 주재국 외무성을 방문해야 한다. 둘째 조회나 공식 사적인 연회 등의 교제석상에서 청나라 공사의 다음 자리에 앉아야 한다. 셋째 중대한 외교상의 안건은 미리 청나라 공사와 의논해야 한다는 것으로서 조선의 자주권을 제한하는 조처였다. 1889년(고종26) 함경도 지방에서는 일본인들의 내지 통상으로 인한 곡물수출량의 증가로 시장에서 곡물을 구경하기 힘들게 되었다. 이해 9월 함경감사 조병식(趙秉式)은 흉년을 이유로 10월부터 1년간 황두(黃豆)의 대일 수출을 금지 하는 방곡령을 내렸다.
개화의 물결은 왕실내부에서도 일었다. 배재학당이 문을 연 그 다음해 미국 감리교 여선교사 스크랜튼이 여성교육기관을 설립했는데 1886년 10월22일 명성황후는 이 교육기관에 이화학당(梨花學當)이란 이름을 하사했다.1887년 초봄 경복궁에 전기가 가설되었고 1888년 3월에는 미국인 여의사 홀튼이 명성황후의 전속의사로 취임했으며 1890년 커피와 홍차가 궁중에서 사용 되었다.
이 무렵 수심경천(守心敬天)과 보국안민(輔國安民)을 표방하는 동학(東學)은 농민들에게 급속히 확산되고 있었다. 1892년 11월 1일 교조 최제우(崔濟愚)의 신원(伸寃)을 위해 동학교단은 최초의 대규모 집회를 삼례(參禮)에서 가졌다. 이듬해 2월 11일에 열린 1차 보은집회(報恩集會)의 결정에 따라 2월 12일 박광호(朴光浩), 손병희(孫秉熙), 등 40여명이 광화문에 모여 복합상소를 올렸다. 별 성과가 없자 3월 10일 다시 보은에서 2차 집회가 열렸는데 2만명이상의 동학교도가 참가했다. 모임을 거듭할수록 조정에 대한 요구도 교조신원의 차원을 넘어 제폭구민(除暴救民), 척양왜창의(斥洋倭倡義)로 발전 , 변모해갔다. 1894년(고종31) 1월10일 새벽 고부군수 조병갑(趙秉甲)의 학정에 항거 전봉준(全琫準)이 지휘하는 1천여명의 농민들이 관아를 습격하면서 동학혁명(東學革命)은 시작되었다. 녹두장군 전봉준은 각처의 동학접주들에게 통문을 돌려 동참을 호소했고 동학군이 백산(白山)에 이르렀을 때 8천명 이상이 가담하는 혁명의 대오를 이루게 되었다. 4월6일 황토현(黃土峴)에서 관군을 격파한 동학군은 정읍, 무장, 영광, 장성 등을 거쳐 4월 28일 전주(全州)를 점령했다. 전주입성이후 동학군이 관군에게 보낸 소지문(訴志文)에 국태공(國太公) 즉, 대원군을 받들어 감국하자는 것이 왜 나쁜가라는 구절이 들어 있었는데 이를 본 고종과 명성황후는 크게 노하여 즉시 민영준(閔永駿)을 불러 청나라에 구원병을 청할 것을 재촉했다고 매천야록에 기록되어 있다. 이 자리에서 명성황후는 「동학의 무리들을 내 어찌 왜놈처럼 여기랴만 임오군란과 같은 일을 다시는 참을 수 없다」면서 천진조약의 규정을 들어 청병을 주저하는 민영준을 꾸짖었다 한다.
  • 5월 5일 청나라 선발대 9백 10명 인천 도착
  • 5월 7일 동학군이 관군과 화의하고 전주성에서 해산. 조정은 청·일 두나라 군사들의 철군을 요청했으나 무산
  • 6월 23일 일본군함 풍도 앞바다에서 청나라군함 격침
  • 6월 25일 갑오개혁(甲午改革)
  • 7월 1일 청·일 양국 선전포고
  • 9월 3일 동학군 재차 봉기
  • 11월 9일 동학군 공주 우금치전투에서 패배
  • 12월 2일전봉준 체포
  • 12월 3일 김개남(金開南) 체포
  • 12월 24일 손병희 휘하의 북접주력부대가 해산하면서 동학혁명의 불길도 가라앉았다.
청일전쟁에서 연전 연패로 허덕이던 청나라는 급기야 영·미·독·불·러 등의 열강에게 일본군과의 휴전조정을 요청하게 되었고 기세가 오른 일본은 이때부터 본격적인 조선정략에 나서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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