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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모명성황후

을미사변

명성황후 국장 모습 이미지 동학혁명을 진압하기 위해 조정은 청나라에 출병을 요청했으나 텐진조약의 규정에 따라 일본군대도 조선에 불러들이는 결과를 초래했다. 1894년 6월 21일 일본군은 용산에 주둔하고 있던 1개 연대규모의 병력을 동원 경복궁을 포위하고 장안의 4대문을 접수했다. 대궐로 들어온 일본공사 오또리 게이스케 (大鳥圭介, 일본의 정치가 1833~1911)는 고종과 명성황후를 위협해서 대원군을 불러들이게 했다. 25일 일본이 말하는 소위 [조선왕국의 자주독립을 위한 내정개혁]의 일환으로 군국기무처(軍國機務處)가 설치되면서 강요에 의해 갑오개혁이 시작되었다. 군국기무처는 28일 [의정부가 백관을 거느리고 서정을 다스리며 국가를 경영한다]는 관제의 개혁을 결의했다. 왕권이 유명무실해지는 순간이었다. 이 개혁의 결의에 참여했던 김홍집(金弘集) 은 [오백년 조종(祖種)의 구제도를 신(臣)의 손으로 변혁했으니 뒷일이 매우 두렵습니다]라고 고종에게 아뢰었었고 영돈녕부사 김병시는 [군주가 욕된 일을 당하면 신하가 죽음으로써 보은해야 한다는 대의를 져버리고 있으니 한스럽기 짝이 없다]면서 눈물을 흘리자 [임금의 얼굴에 슬픈 빛이 떠오르고 곁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눈물을 머금었다]고 갑오실기에 기록되어 있다. 이 무렵 이또오히로부미(伊籐博文)가 주재하는 일본 각의(閣義)는 외무대신 무쓰가 상정한 4개 항목의 대조선 정략안을 검토하고 있었다. 그 내용은 조선을 1.독립국으로 공인하자는 안(案) 2.일본의 보호국으로 하자는 안 3.일·청 공동보호국으로 하자는 안 4.벨기에, 스위스 같은 중립국으로 만들자는 안이었다. 결국 두 번째 안을 채택한 일본은 7월 20일 잠정이라는 미명 아래 조선에서의 중요한 권익을 점유하는 조일잠정합동조관(朝日暫定合同條款)을 체결했고 7월 26일 청일전쟁에 조선은 일본군대의 진퇴와 식량 등의 편의를 제공해야 한다는 공수동맹(攻守同盟)을 강요. 조선이 청나라에 적대적인 위치에 서게 만들었다. 이에 형조참의 이남규(李南珪)는 청절왜소(淸絶倭疏)를 올려 일본의 교활한 사슬을 지적하면서 조약을 폐기하고 열국과 힘을 합쳐 일본을 토벌할 것을 주장하여 이 시기의 민심을 대변하기도 했다. 9월 28일 신임 일본공사 이노우에(井上馨)가 부임했다. 그는 갑오개혁 이후 왕권이 무시 당해온 점을 인정하면서 고종과 명성황후에게 접근했고 청나라와 내통했다는 혐의로 대원군을 문책, 10월 21일 대원군을 정계에서 은퇴케 했다. 이후 [왕실이나 세자에 대한 걱정만 없다면 여자의 몸으로 왜 정치에 가담하며 척족을 기용하려 하겠는가]라고 말하는 명성황후와 조선을 마음대로 전단하려는 이노우에는 자주 마찰을 일으키며 1895년을 맞게 된다.
옥호루 이미지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고 1895년 3월 23일 하관조약(下關條約)이 체결되었다. 그러나 2월 29일 러시아, 독일, 프랑스 3국이 간섭을 시작했다. 4월 11일 일본은 [3국 정부의 우호적인 권고대로 요동 반도의 영구적인 점령을 포기한다]는 각서를 3국 정부에 전달했다. 러시아의 위력을 새삼 실감한 명성황후는 적극적인 인아거일책(引俄拒日策)을 추진했다. 친러파가 내각에 중용되고 고종은 [작년 6월(갑오경장)이래 칙령이나 재가사항은 어느 것이고 짐의 의사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이를 취소한다]고 선언하였다. 이어 5월 20일 앞으로는 임금자신이 매일같이 정부의 대신들과 접촉하여 대소의 정사를 심의 결정하고 친재한 다음에야 실행토록 할 것이라는 조칙을 발표했다. 이 조처는 왕권회복과 일본지배의 거부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 동안의 노력이 수포로 돌아갈 것을 우려한 일본은 7월 13일 이노우에 후임으로 미우라를 부임시켰다. 미우라는 이노우에와 같은 고향사람으로서 예비역 육군 중장출신이며 군공을 인정받아 자작(子爵)이 된 이래 일본궁정의 고문으로 있었다. 미우라는 [한몸을 희생할 결심으로 부임한다]고 주변 사람들에게 털어 놓았다 한다. 신임장 봉정을 위해 고종을 배알할 때는 단지 [정치에는 관심이 없고 이 땅의 풍월이나 즐기면서 명성황후께 관음경의 일부를 청사(淸寫)하여 드릴까 한다]는 말뿐이었다. 교묘하게 고종과 명성황후를 안심시킨 미우라는 8월 2일 명성황후 시해계획을 구체화했다.
  • 궁중의 간신을 제거하여 국정을 바로잡는다는 명분아래 대원군을 입궐시키고 명성황후를 시해한다.
  • 행동부대의 표면에는 훈련대를 내세워 조선인이 일으킨 쿠데타를 가장한다.
  • 행동의 전위대로는 일본낭인부대를 앞세우고 이들을 위한 엄호와 전투의 주력은 일본군수비대가 담당한다.
  • 대원군의 호위의 별동대로는 일본인 거류지의 경비를 담당하는 일본경관을 동원한다는 내용이었다.
소정각 이미지 거사에 참가할 병력은 일본낭인 30여명, 경찰 10여명, 조선군훈련대, 일본군수비대로 구성했다. 당초 거사일은 8월 22일이었으나 조정에서 8월 19일 일본군이 교육해 온 조선인 훈련대의 해산을 결정하고 20일 무장해제를 단행하겠다고 미우라에게 통보해오자 명성황후 시해계획은 8월 20일로 앞당겨지게 되었다.
1895년(고종32) 8월 20일(음력 10월 8일) 운명의 날은 시작되었다. 새벽 5시 30분쯤 훈련대 연대장 홍계훈이 군부대신 안경수와 함께 1개중대의 시위대 병력을 이끌고 광화문을 들어오는 흉도들과 첫 접전을 벌였다. 그러나 10분만에 홍계훈이 전사하고 안경수와 시위대 병력은 사방으로 흩어져 도주했다. 두 번째 접전은 미국인 교관 다이장군이 지휘하는 시위대와 일본수비대 사이에 있었으나 시위대는 총 한번 변변히 못 쏘고 패주했다. 흉도들은 두패로 나뉘어 건청궁(乾淸宮)으로 들어왔다. 동쪽 곤녕전에는 고종과 왕세자가 있었고 서쪽 옥호루에는 명성황후가 있었다. 옥호루에 난입한 흉도들은 궁내부 대신 이경직(李耕稙)을 살해하고 비명을 지르는 궁녀들의 머리채를 잡아 칼을 들이대고 명성황후의 소재를 물었으나 찾을 수 없자 용모와 복장이 우아하여 황후라고 생각되는 여인을 3명이나 살해했다. 이 참혹한 장면을 미국인 교관 다이 장군과 러시아인 기사 사바틴이 지켜보고 있었는데 이때 이미 명성황후는 누군가의 칼에 의해 시해되고만 뒤였다. 명성황후의 시해장면을 왕세자의 목격담이 담긴 미국공사관의 보고와 사바틴의 증언을 토대로 한 영국 영사의 보고를 근거로 하여 구성했다. [흉도들이 명성황후의 침실로 향하자 궁내부 대신 이경직은 서둘러 황후에게 변란을 알렸다. 황후와 궁녀들이 잠자리에서 뛰쳐나와 숨으려는 순간 흉도들이 달려 들었고 이경직이 황후를 보호하고자 두팔을 벌려 가로막다가 양팔목이 잘려 피를 흘리며 죽었다. 이 틈에 황후는 뜰 아래로 뛰어가다가 흉도들에게 붙잡혔으며 흉도들은 수차례 황후의 가슴을 내리 짓밟으며 칼로 거듭 황후를 찔렀다. 실수없이 해치우기 위해 황후와 용모가 비슷한 여러 궁녀들도 살해되었다. 그때 여의사가 앞으로 나서 손수건으로 황후의 얼굴을 가렸다] 곤녕전에 있었던 고종도 흉도들이 난폭하게 잡아끌어 옷이 찢겼고 왕세자는 부상을 입었다. 민태호의 딸이며 영익의 동생이었던 왕세자비도 이 현장에 있었는데 명성황후를 보호하다가 넘어져 반나절이나 기절해 있었으며 이때 다친 허리가 평생의 고질이 되었다 한다. 술에 취한 몇몇 흉도들이 죽은 궁녀들을 시간(屍姦)했다는 보고도 있다. 명성황후의 시신이 능욕(凌辱)을 당했는지는 확실치 않다. 그러나 일본측의 조사기록을 보면 [죽은 명성황후의 얼굴이 너무 젋어 (20대 중반의 모습이었다고 한다) 젖가슴을 살펴보고 확인했다]고 되어 있다. 명성황후는 죽어가면서 왕세자의 이름을 세 번씩이나 불렀는데 왕세자도 이를 들었다고 술회하고 있다. 흉도들은 명성황후의 시신을 녹원(鹿園) 숲속으로 운반한 뒤 장작더미 위에 시신을 올려놓고 불을 질렀다. 계속 석유를 뿌려가며 뼈만 남을 때까지 반복했다. 1895년 8월 20일 오전 8시경이었다. 이로서 밀려오는 외세에 당당히 맞서며 기울어져 가는 나라를 일으켜보려던 비운의 여인 명성황후는 파란만장했던 생을 마감했다. 이때 나이 44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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