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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모명성황후

인품과 사상

명성황후의 인물됨이 어떠했는지 자료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어 일률적으로 말하기 어려우나 명성황후를 친견했던사람들의 기록을 중심으로 그 됨됨이를 가늠해 보고자 한다.

지혜와 통찰력을 갖춘 뛰어난 외교력의 소유자 이미지

이사벨라 비숍 (지리학자, 여행가)

[ 윤기나는 새카만 머리와 흰 피부를 가졌고 몸매가 호리호리한 잘 생긴 부인이었다 ]

[ 눈은 차갑고 날카로왔으며 재기가 뛰어난 지성적인 인상을 주었다 ]

언더우드부인 (선교사)

[ 중국 고전에 조예가 깊었고 세계 여러나라에 관해 많은 지식을 갖고 있었다 ]

[ 폭 넓고 진보적인 정책과 국민복지를 추구했다 ]

[ 따뜻한 온정과 어린이들에게 부드러운 사랑을 주었다 ]

[ 재치있는 외교관 같았으며 늘 반대자들을 이겼다 ]

윌리암 샌드 (미국 서기관)

[ 개성이 강하고 굽힐 줄 모르는 의지의 여성이었으며, 시대를 앞섰고 여성을 초월한 정치가였다 ]

[ 무조건 외국에 반대한 것이 아니라 자기나라가 살아 남아서 서방제국과 평화롭게 지내기 위해서는
일부 서양문물에 대한 적응의 필요성과 정부의 필요성을 이해했던 분이라고 생각한다 ]

벙커 (감리교 선교사)

[ 친절한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굳센 의지와 강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

굳센의지와 강한 성격의 소유자 이미지

이노우에 (일본공사)

[ 아름다운 성품과 탁월한 능력을 가진 귀부인이었다 ]

알렌 (선교사, 의사)

[ 개성이 강한 분이었으며, 아시아의 위대한 인물중의 한분이었다 ]

메켄지 (런던, 데일리 특파원)

[ 친구들에게는 친절하나 적에게는 타협을 모르는 분이었다 ]

[ 일본인들과는 때로는 반대하면서 자기 권력을 증가시켜 나갔다 ]

원세개 (조선총리교섭통상사의)

[ 원비는 자신이 악한 것을 뉘우치지 않고서 매우 강팍한 성질을 부린다 ]

미우라 (을미사변 당시 일본공사)

[ 왕비는 매우 재능이 풍부한 분 같았다.내가 국왕을 알현할 때 뒤의 발을 살짝 열고는
국왕에게 무엇인가 조언을 하고 계셨다. 좀처럼 빈틈이 없는 왕비로 여겨졌다 ]

명성황후의 인품을 가늠해 볼 수 있는 자료가 하나 더 있다. 명성황후가 죽은 뒤에 쓰여진 것이라 미화된 부분이 있을 수 있으나 없는 것을 지어내지는 않았을 것이다. 1897년(光武원년 고종34) 10월 명성황후의 시신을 경운궁의 경효전(景孝殿)에서 홍릉으로 옮기면서 궁내부 특진관 김병시(金丙始)가 고종의 명을 받아 제술한 명성태황후 애책(哀冊)에 보면 [저 울창하고 누런 명마의 땅 여주에서 일찍이 사록(沙麓)의 상서가 저축되더니 우리 인현왕후로 부터 6세에 이르러 거듭 빛을 발하여 왕도가 거기에 터를 잡은 바되고 중궁의 교화가 도탑게 펼쳐졌습니다. 부드러워 온화하고 공손하시며 은혜로운 학문은 가득차고도 심오하시었으며, 종묘 사직을 받드는 제수에 정성과 경건을 다하시고 가르침에는 동륙을 먼저 하시고 아랫사람을 거느림에는 몸소하심을 우선 하시니 열어(列御) 모두 흠복하였습니다. 역대의 사승(史乘)과 국조의 헌장(憲章)을 한번 편람하시면 문득 기억하고 암송하시었으며, 영특한 인재를 가려내고 조잡한 자를 쓸어내시면서 한결같이 사교(四敎:婦德,婦言,婦容,婦功)를 준수하여 움직임과 금슬이 종고(鐘鼓)와 같으시니 나라의 풍교가 거기에서 비롯되었고 반려(伴侶)에게서 어진 바를 구하시니 경계하는 바로서 올바름을 도모하여 도우신 것이 깊고도 커서 밝고 큰 천명을 맞이하여 이으시게 하였습니다. 현익(임오군란이 났던 1882년을 이름)의 해를 만나 어둡고 가난한 운수를 당하셔서는 험조한 경로를 거듭 겪으셨으나 지극하신 덕이 투체되지 아니하였습니다] 라고 쓰여 있다.
국모 명성황후의 앞날이 순탄치만은 않으리라는 예고이기나 한것처럼 1866(고종3)은 벽두부터 술렁이고 있었다. 북경조약으로 연해주의 블라디보스톡까지 진출한 러시아가 수차례 통상을 요구하자 이미 청나라가 구미열강에게 곤욕을 치루고 있음을 알고 있던 조정에서는 이이제이(以夷制夷)의 수단으로 프랑스 세력을 통해 러시아를 견제하려는 방아책이 대두되었다. 당시 조선에는 프랑스인 주교 베르뇌를 비롯한 선교사들이 활동하고 있었다. 대왕대비 조씨와 유림으로부터 천주교를 비호한다는 비난을 들으면서까지 천주교에 호감을 보였던 대원군도 조선천주교인을 통해 프랑스세력을 끌어들일 방법을 궁리하고 있었다. 그러나 남종삼(南鐘三)을 통해 베르뇌 주교와의 접촉이 실패하자 대원군은 태도를 돌변하여 1866년 1월 9일 베르뇌 주교화 홍봉주, 남종삼 등을 체포하고 1월 21일 효수형에 처했다. 이것이 1801(辛酉迫害), 1839년(乙亥迫害)에 이어 전국을 핏빛으로 물들이면서 8천여명의 순교자를 낸 병인박해(丙寅迫害)의 시작이었다.
경복궁 중건이 한창이던 1866년 3월 6일밤(왕비간택이 발표되기 하루전) 광화문 동쪽에 있는 동십자각(東十字閣) 근처 훈국화사(訓局畵師)의 가가(暇家)에서 불이나 인접한 가옥 8백여간이 타고 공사에 쓰일 목재가 모두 소실되었다. 대원군은 입직 당상관 임태영(任泰瑛)을 파면시키고 수직군사들을 유배형에 처하면서 한편으로는 공사를 강행시켰다. 그러나 가까운 곳의 목재는 거의 베어다 썼으므로 목재와 석재의 운반거리가 점차 멀어지게 되어 그만큼 인력과 재정이 과다하게 소모되었다. 더구나 마을의 성황당 거목과 양반묘지의 보호림까지 벌채해 차츰 민심이 동요하기 시작했다.
궁궐에 들어온 명성황후는 신정왕후(神貞王后, 익종비) 조씨, 효정왕후(孝定王后, 헌종비) 홍씨, 철인왕후(哲仁王后, 철종비) 김씨 등 3명의 대비와 왕실의 어른은 물론 대원군과 부대부인에게도 효성을 다하고 수많은 궁녀들을 대함에 있어서도 기품을 잃지 않아 궁중의 모든 사람들로부터 사랑과 존경을 한몸에 모았다. 친정쪽 집안의 제삿날이나 생신일을 기록하였다가 일일이 제수와 반찬 등을 챙겨보내는 자상함도 잃지 않았다. 명성황후보다 3년 먼저 궁중생활을 시작한 고종은 이때 궁인 이씨를 총애하고 있었다. 자연 고종과의 관계가 소원해진 명성황후는 주위의 연민속에 독서를 심취하게 되는데 사서삼경, 춘추좌씨전 등의 고전과 대원군이 비상한 열의를 가지고 편찬케 한 대전회통(大典會通), 종실의 종보인 선원보략(璿源譜略), 주요 양반가문의 족보를 간추린 동국세보(東國世譜) 등 고금의 명서들을 탐독 통달하여 후일 고종을 도와 국정에 참여할 발판을 마련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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