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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가 유적지

감고당

  • 감고당 소개
  • 안채
  • 사랑채
  • 중문채
  • 행랑채
감고당
조선시대 제19대 숙종이 인현왕후의 친정을 위하여 지은 집으로 희빈 장씨의 모함을 받아 폐위된 후 5년여 동안 유배되어 있던 곳이고, 명성황후가 8살때 여주에서 한양으로 올라간 후 1866년(고종3) 왕비로 책봉되기 전까지 살았던 곳이다. 원래 종로구 안국동 덕성여고 본관 서쪽에 있다가 1966년 도봉구 쌍문동으로 옮긴후 2004년 쌍문중고교 신축계획에 따라 철거될 위기에 처한 건물을 2006년 해체한 후에 명성황후의 고향으로 원형을 이전 복원하였다.

안채

안채
안공간인 안채는 몸채, 내당 등으로 불리기도 하며, 집안의 주인마님을 비롯한 여성들의 공간으로 대문으로부터 가장 안쪽에 위치하였다. 안채는 안방,대청, 건넌방, 웃방, 다락, 부엌 등으로 구성되었다.

안채의 안방은 조선시대 상류주택의 실내 공간 중에서도 상징적으로 가장 중요한 위치에 있었으며, 출산, 임종 등의 일이 이뤄지던 여성들의 주된 생활공간이다. 안채는 위치상 대문으로부터 가장 안쪽인 북쪽에 위치하고 있다. 이는 조선시대 여성들의 외부 출입을 제한하던 당시 사회상을 반영하는 공간배치라고 볼 수 있다.

명성황후(1851-1895)가 8세 때부터 왕비로 간택·책봉되기 전까지 이곳에서 머물렀고, 숙종의 계비인 인현황후(1667-1701)가 왕비에서 물러난 후 이곳에서 거처하였다.
이전 복원하였다.

사랑채

사랑채
사랑채는 남자주인과 귀한 손님이 기거하는 공간이다. 행랑채와 중문채 사이에 자리하였고, 대청, 사랑방, 누마루로 구성되어 있다. 사랑채는 외부로부터 온 손님들에게 숙식을 대접하고 이웃이나 친지들이 모여서 친목을 도모하고 집안 어른이 자녀들에게 학문을 교육하는 장소이기도 하였다.

또한 사대부 남자들이 모여서 학문에 대해 열띤 토론을 하고 시를 짓거나 거문고 등의 악기를 연주하며 수준 높은 문화생활을 한 것도 사랑채에서였다. 유학을 장려하여 문필문학을 존중하고 경전을 연구하는 풍조가 만연하였던 조선시대에는 사랑방 문화가 발달하였다.

중문채

중문채
안채와 사랑채 사이에 자리 잡고 있는 중문채는 중간계층인 청지기 등이 거처하였던 곳이다. 또한, 쌀, 김치, 장작 등을 보관하는 공간으로 활용되었다.

안채의 부속건물이라 할 수 있고, 안채와 사랑채 중간에 자리 잡고 있어 여성의 거주공간인 안채를 보호하고 방어하는 기능을 하였다.

행랑채

행랑채
행랑채는 대문간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위치하여 집안에서 가장 신분이 낮은 머슴들이 기거하는 공간이었으며, 곡식을 저장하는 장소로도 활용하였다. 이곳에서 하인들이 농한기에는 새끼를 꼬고 가마니를 짜는 일을 하였다.

조선시대 상류주택은 신분과 남녀별, 장유(長幼)별로 공간을 분리하여 대가족이 함께 어우러져 사는 당시의 가족생활을 고려한 공간 배치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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