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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야기 둘. 여주 人

    밭살 좋은
    여주 땅에 화답

    농부 조용삼

    도시내기에게 ‘농부’란 그저 ‘농사짓는 사람’으로 단순히 갈무리되지만, 사실 이 말 켜켜이엔 수많은 결이
    숨어 있다. 온 나라 구석구석 흙이 다르듯, 거기에 뿌리를 내리고 자라는 작물 또한 얼마나 많을 것이며,
    저마다의 생래적 이치를 알고 살뜰히 키워내는 농부들은 또 얼마나 무수하겠는가?
    그를 만나고 알게 됐다. ‘농부’는 다 같은 농부가 아니며, 모두 특별하다는 것을.

    글 이현주(편집실) 사진 김성재(싸우나스튜디오)
  • 조용삼 씨는 이곳 여주에서 75살까지 농사를 지을 계획이다.
  • 농부가 되어 흉년 무서운 줄 알았어요

    여주시 능서면 오계리. 농부 조용삼 씨의 하루는 이곳 약 1만 9,800㎡(6,000여 평)의 밭에서 시작된다. 일단 커피 한 잔을 마시는 것으로 하루를 여는 것은 도시 생활과 별반 다르지 않지만, 흙을 밟고 하늘을 살피는 것은 농부가 된 후에 몸에 밴 일상이다.

    그를 만나러 간 8월 말 무렵, 너른 밭에는 검은깨, 옥수수, 토종 찰옥수수, 수수가 제각각 저마다 터를 잡고 자라고 있었다. 농사는 전혀 모르는 도시내기인지라 ‘토종 찰옥수수’가 낯설어 물어보니, 다른 옥수수와 달리 늦여름에 심어 가을에 수확하는 옥수수란다. 전라북도 고창에 계신 어머니가 심던 씨앗을 받아 10년 넘게 심고 있는데, 크기는 일반 옥수수보다 작지만 그 맛이 일품이라고. 대추방울토마토와 더불어 토종 찰옥수수는 그의 작물 중 이른바 ‘히트 상품’이다. 또 다른 밭 한편에는 얼마 전 수확을 마친 알이 굵은 땅콩도 눈에 띈다.

    조용삼 씨는 키 큰 옥수수밭과 수수밭에선 서서, 키 작은 검은깨밭에선 구부려 눈높이를 맞춰가며 아이 돌보듯 찬찬히 작물들을 살핀다. 그나마 9월 초까지가 1년 중 가장 한가한 시기라며 여유롭게 밭을 둘러보는 그는 지금껏 흙을 떠나본 적 없을 것만 같은 천생 농부의 모습이다.

    그러나 사실 그는 귀농인이다. 그가 이곳 여주 땅에 터를 잡은 것은 2005년. 그 전까지 그는 서울에서 컴퓨터 프로그래머로 일했다. 여전히 많은 이들이 이름을 기억하고 있는 하이텔. 거기서 쇼핑몰 개발을 맡았었다.

    “쇼핑몰 개발자로 일한 뒤 다른 직장을 다니다 그만두고 무얼 할까 고민했죠. 그러다 직접 쇼핑몰을 운영해 농산물을 팔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마침 처남도 농사를 짓고 있었거든요. 그런데 서울에서 하려니 상품 조달이 쉽지 않았어요. 개발자로 일하다 영업, 홍보까지 하려니 체질에도 맞지 않았고요. 그래서 직접 농사를 지어 내가 기른 작물을 팔아보자고 마음먹었죠.”

    농사짓는 부모님 밑에서 자란 그에게 농사는 낯설지 않았다. 그의 귀농 선언에 가족들도 별 반대 없이 따라주었다. 그런데 하고 많은 곳 중 왜 여주를 택했을까? 사실 그는 여주와 큰 인연이 있었다. 바로 아내의 고향이었던 것. 귀농의 여러 어려움 중 하나인 ‘텃세’는 그렇게 아내 덕분에, 그리고 본인 표현처럼 좋은 인상 덕분에(?) 큰 어려움 없이 넘어가긴 했지만 역시 새내기 농부에게 농사란 쉽지 않았다.

    “귀농 후 5년 정도는 어려웠어요. 농사 실력이 없어 시행착오도 많았고 밭을 갈아엎어야 하는 상황도 있었죠. 농사를 시작하고 ‘흉년’이 무섭다는 사실도 제대로 알게 됐어요. 도시에서는 못 느꼈지만 실제 흉년을 접하고 나니 머리카락이 쭈뼛 선다는 말이 뭔지를 실감했죠.”

    컴퓨터 프로그래머에서 어엿한 농부가 되기까지, 얼마나 고된 일이 많았을까? 그래도 다른 곳도 아니고 여주가 아닌가. 좋은 쌀로 그토록 유명한 땅이니, 논농사든 밭농사든 농부의 땀만 있다면 여문 작물이 날 수밖에 없을 터. 그의 표현대로 ‘밭살’이 좋은 여주는 너른 품으로 그를 품어주었고 그는 친환경 농사로 그 땅에 화답하는 중이다.

    • 조용삼 씨가 정성껏 키우고 있는 검은깨
    • 수확을 기다리며 영글어가는 옥수수

    좋은 농사, 나쁜 농사는 없습니다

    대추방울토마토, 양파, 감자, 옥수수, 땅콩, 검은깨, 수수, 고구마, 잡곡…. 조용삼 씨가 한 해 동안 키우는 작물들이다. 4월부터 11월까지 작물마다 씨를 심고 수확할 시기가 정해져 있고 그에 따라 수입도 주기적으로 들어온다. 농부의 마음은 알 것 같아도 아직 농사를 잘 짓는지 모르겠다고 겸손하게 말하지만 그에게는 다 계획이 있었던 것. 그 계획 중 가장 큰 것은 바로 친환경 농사를 짓기로 한 것이었다.

    “경쟁력을 갖기 위해 친환경을 선택했는데, 이제 와보니 잘한 일이라고 생각해요. 돈을 벌기 위해 자연을 착취하기보다 보호해가며 상생하는 것이 옳다고 믿기 때문이죠. 그렇다고 친환경 농업을 하지 않는 것을 부정적으로 봐선 안 됩니다. 수확을 많이 내는 것은 농부의 중요 덕목이죠. 특히 농업 인구가 적은 현실에서 대량 수확으로 많은 이에게 식량을 공급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고 의미 있는 일입니다. 선택의 문제일 뿐, 농사에 있어 좋은 농사, 나쁜 농사는 없습니다.”

    친환경 농업을 하려면 지켜야 할 기본 원칙이 있다. 돌려짓기가 그 대표적인 예다. 돌려짓기는 이름 그대로 한 밭에서 작물을 돌려가며 키우는 것이다. 고구마를 심은 밭에는 다시 고구마를 심어선 안 되고, 전혀 다른 종을 심어야 한다. 학창시절 생물 시간에 배운 분류체계인 ‘종속과목강문계’ 중 같은 ‘과’ 작물은 길러선 안 된다. 예를 들어 옥수수와 수수, 기장은 같은 과로 피해야 하는 것. 고구마를 심은 뒤에는 땅콩, 그다음에는 감자, 그다음에는 수수를 키우는 식으로, 2년 3기작이나 3년 4기작으로 돌아가며 키우다 보니 작목이 많아질 수밖에 없다.

    “같은 땅에서 한 가지 작목만 계속 키우면 그 작목이 필요한 영양소만 흡수해 그 영양소가 결핍되고 결과적으로 땅이 황폐화되죠. 또 그 작물을 좋아하는 병해충이 계속 생겨 생산량도 떨어져요. 그렇게 되면 어쩔 수 없이 비료를 많이 줘야 하고 농약을 쓸 수밖에 없어요. 그래서 친환경 농업은 돌려짓기를 원칙으로 하고 있어요.”

    그렇게 땅을 아껴가며 아무리 정성껏 키운다 하더라도 그것을 알아주는 소비자가 없으면 소용없었을 터. 그러나 그의 농사는 90%가 계약 농사로 이루어져 판로 걱정은 거의 없다. 그는 한살림 생산자로 수확량 대부분은 한살림과 경기도 친환경 학교 급식으로 공급하고, 나머지 10%는 쇼핑몰 시절부터 갖고 있던 ‘고객 리스트’를 통해 판매한다. 이제는 단골 고객이 있어 수확 때가 되면 고객이 먼저 전화를 걸어오기도 한다고. 지금쯤 조용삼 씨 못지않게 토종 찰옥수수가 잘 영글기를 바라는 고객도 제법 많을 듯싶다.

    막 수확을 마친 땅콩

    일흔다섯 살까지 농사를 짓겠습니다

    요즘 귀농을 꿈꾸는 이들이 적지 않다. 자연에 기대어 땀 흘리는 만큼 대가가 있다고 믿어 진입 장벽이 없을 듯싶지만, 조용삼 씨는 결코 그렇지 않다고 이야기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판로일 것이고, 농업기술을 익히는 데도 시간이 오래 걸린다. 또한 장비는 물론이고 트럭 한 대쯤은 있어야 하고, 인력을 쓸 수 있는 네트워크도 필요하다. 그러나 무엇보다 사람 간의 관계가 어렵다는 것은 도시 못지않다. 조용삼 씨는 그런 어려움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한살림 생산자들끼리 공동 농장 활동을 하고, 귀농 학교도 운영하고 있다.

    “제 위로 10여 분이 있는데 70대고, 아래로는 3명 정도뿐이더라고요. 이러다 공동체 운영이 어려울 수도 있겠다 싶었어요. 그래서 공동 농장을 만들어 1년에 30일 정도 모여 함께 농사를 짓고 있어요. 귀농 희망자에게 농사를 가르치는 귀농 학교는 올해로 2년 차가 됐어요. 귀농 희망자가 귀농하면 여주 땅도 소개해주고, 공동체 내에서 도움받을 수 있도록 하고 있지만, 아직 귀농을 결심한 분은 없네요.”

    귀농 학교에서 직접 농사를 체험하고 난 후 농사가 이렇게 힘든 줄 몰랐다며 절대 못 하겠다고 이야기한 참가자가 있었다는 걸 보면, 역시 농부는 누구나 꿈꿀 수 있지만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닌 듯싶다. 그런데도 조용삼 씨는 75살까지는 농사를 계속 짓겠다고 한다.

    농사지으며 한편으로 ‘한 바구니 농부’라는 이름으로 블로그 활동도 꾸준히 하는 그는 이제 큰 욕심은 없다고 이야기한다. 평당 매출 1만 원. 크다면 크고 작다면 작은 그의 목표가 꼭 이루어지길 응원해본다. 한 바구니만큼의 수확으로도 충분히 행복해할 것 같은 그이지만, 그 바구니가 크고 여러 개가 되어 친환경 농산물을 가득 담아 오래오래 많은 이들에게 나누어주길. 밭살 좋은 여주 땅도 오래도록 그에게 든든한 터전이 되어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