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식지 pdf 다운로드
  • 이야기 둘. 여주 테마 기행

    여주의 시간을 품은
    나무의 공간들

    - 해평 윤씨 종택 · 황학산수목원 · 목아박물관

    자연의 비바람을 맞고 자란 나무는 지나온 시간을 나이테로 몸에 새긴다.
    수십·수백 년을 한자리에서 여주의 시간을 오롯이 지켜보고 버텨온 나무는 묵묵히 모든 것을 추억한다.
    나무를 주제로 떠나는 여주 기행에서 공간별로 다양한 형태의 나무가 들려주는 이야기에 귀 기울여보자.

    글 권라희(편집실) 사진 김성재(싸우나스튜디오)
    반가집의 위풍을 드러내는 사랑채
  • 해평 윤씨 동강공파 종택 솟을대문에 새겨진 종훈
  • 조선 반가집의 품위를 갖추다

    해평 윤씨 동강공파 종택 - 경기 문화재자료 제97호
    가문의 기억을 담다

    여주의 샛강 청미천을 따라 펼쳐진 희고 고운 모래밭을 따라가면 이름도 예쁜 모래실 마을이 나온다. 그중 달걀봉 줄기를 뒷동산으로 두른 채 청미천을 앞에 끼고 너른 들판을 건너 오갑봉이 둘러싼 배산임수 터에 자리한 고풍스러운 기와집을 만날 수 있다. 여주의 3대 명문가로 금사면 남양 홍씨와 삼밖골 여흥 민씨, 모래실 해평 윤씨를 꼽는데, 이곳이 바로 해평 윤씨 동강공파의 종택이다.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행랑채가 한편에서 손님을 맞는다. 정면에 위풍당당하게 안채가 서 있고, 안채 건넌방 툇마루와 연결돼 나란히 자리한 사랑채가 기다린다. 본래 안채와 약방채, 사랑채와 사랑중문채, 바깥대문과 행랑채, 연못까지 갖춘 99칸 집이었지만 현재는 46칸만 남아 반가집의 옛 시간을 추억한다.

    상량문에 신축년(辛丑年)이라고 쓰인 글자를 보니 고종 28년(1891)에 세워진 기와집이구나 싶은데, 무려 130년의 시간을 지나온 것에 새삼 놀라움을 갖게 된다. 조선 중기의 문인 윤세주가 처가인 경주 김씨의 고향에 터를 잡고 이 집을 세웠다고 한다.

    해평 윤씨 가문은 역사의 소용돌이 한복판에 있었다. 대대로 벼슬을 한 집안이었으나 수양대군이 왕위를 잡고자 일으킨 계유정난 때 병장기를 관장하던 처공과 가족이 참형을 당하고 일가친척까지 유배에 처했다. 광해군을 왕위에서 끌어내린 인조반정 후에는 인성군 처가의 가문이라며 고초를 겪었다. 병자호란을 기점으로 조선 중기 문신 남악 윤승길이 남한산성에서 인조를 구해낸 공로를 인정받아 가문을 다시 일으켜 세웠다.

    가문이 겪은 평지풍파만큼이나 해평 윤씨 종택 또한 굴곡 많은 세월을 견뎌왔다. 1950년 후반 근처의 청미천이 홍수로 범람해 솟을대문과 행랑채가 무너지고, 1963년 사랑채가 불타는 등 한동안 초석만 남아 있다가 2015년에 다시금 제 모습을 되찾았다.

    입춘방 글귀를 내거는 여느 반가집과 달리, 솟을대문에 충효를 집안에 전하고 종친 간의 화목을 도모하는 뜻으로 충효전가(忠孝傳家) 종친돈목(宗親敦睦)이라 적은 종훈을 내건 이유도 고난의 시간을 견디고 마침내 빛을 찾은 가문과 종택의 방향을 제시하는 나침반이 아니었을까?

    바깥 풍경이 액자처럼 보이는 사랑채의 누마루 공간
    집은 사는 이를 닮는다

    나무로 지은 집은 사는 이의 삶의 방식을 닮는다. 건축 기행으로 해평 윤씨 동강공파 종택을 둘러본다고 하면 4가지 독특한 지점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우선 안채와 사랑채를 연결하는 복도를 두었다는 점인데, 안주인과 바깥주인이 그만큼 긴밀하게 지냈다는 뜻이기도 하다. 안채에 툇마루가 폭넓게 쓰인 것도 인상적인데, 대청마루와 방을 쉽게 오갈 수 있는 구조다. 이는 평면 구성의 건축에서 쓰임새를 중요시한 조선 후기 반가집의 특징이라고도 볼 수 있다.

    안채 오른쪽 날개 끝에 화방벽을 꽃담과 같이 꾸민 것도 독특하다. 벽돌로 부귀라는 한자를 만들었는데, 궁궐에서는 전각 바깥쪽에 장식과 기원을 위해 만들었던 것과 달리, 반가집에서 안쪽 공간에 꽃담을 꾸민 것은 기원의 의미를 더 강하게 두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 살림채 왼쪽 날개에 영정을 모시는 사당방을 들여놓은 점도 특이하다. 일반적으로는 별도로 사당을 지어 제를 모시는데, 생활공간에 사당방을 꾸렸다는 것은 그만큼 선조의 뜻을 가까이하려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은 아닐까 추론된다.

    사랑채의 초석과 기단이 기능적으로 배열된 점도 주목할 만하다. 초석과 기단을 바탕으로 복원됐기에 벽돌의 다듬새와 색만 보더라도 공들여 만든 집이라는 걸 알 수 있다. 해평 윤씨 동강공파 종택에서 빼놓을 수 없는 공간은 다락처럼 높게 만든 누마루이다. 문을 열고 밖을 내다보고 있으면 그 자체가 액자가 되어 사계절의 아름다움을 만끽할 수 있다.

    위치 : 경기도 여주시 점동면 모래실2길 11
    자유 관람. 내부 방문은 사전 협의
    문의 : 여주시청 문화재관리팀

  • 황학산수목원의 각종 희귀식물과 곤충들
  • 푸르름 가득한 천상 정원

    황학산수목원 - 경기공립수목원
    황학산이 폭 끌어안은 듯 평안하고 고요하다

    여주 매룡동, 산세가 유려한 황학산이 폭 끌어안은 듯 평안하고 고요한 황학산수목원은 풀 향기가 가득한 천상 정원처럼 다가온다. 용이 되고 싶었던 이무기가 이곳 매룡지에서 용틀임을 하고 하늘로 올라갔다는 전설 때문이 아니더라도 자신 안에 잠재된 가능성을 다시금 다잡아보고 싶은 이들은 이곳에서의 산책을 권한다.

    황학산수목원은 볼거리와 놀거리, 즐길 거리가 가득한 종합 선물과 같다. 숲 해설사의 안내에 따라 오솔길을 걷다 보면 새로운 시야가 열린다. 나무 이파리를 비비면 왜 솜사탕 냄새가 나는지도 알 수 있고, 빨간 산딸기 열매가 얼마나 새콤달콤한지도 경험해볼 수 있다.

    석정원과 강돌정원에서 돌 사이를 비집고 자라난 식물을 보면서 생명의 경이로움도 느껴보고, 산야초원에서 약용식물을 질겅질겅 씹어보기도 해보자. 미로원에서 연인과 함께 로맨틱한 잡기 놀이를 해봐도 재미있을 것이다. 14개 테마 정원에서 동심으로 돌아가 자연과 어울리다 보면 마음의 묵은 때가 씻겨 내려가는 기분이 들 것이다.

    전망대에서 수목원 전경을 한눈에 내려다보거나 드넓은 잔디피크닉장에서 마음껏 뛰놀고 잔디에 누워 하늘을 바라보는 시간을 갖는다면 행복이라는 단어가 절로 떠오른다.

    끝없는 길이 이어질 것 같은 미로원 내부
    자연이 우리에게 준 것들을 생각하다

    자연은 우리에게 묵묵하지만 강렬한 깨달음을 준다. 황학산수목원은 아이나 가족과 함께 도감을 펴 들고 식물과 곤충 등을 보면서 자연생태 기행을 할 수 있는 최적의 공간이다. 목본 669종과 초본 893종을 더해 총 1,562종의 식물이 우리를 반기는데, 그중에서도 여주 남한강의 냇가 모래땅에서 자라는 진보라색 단양쑥부쟁이는 가을이면 꼭 찾아봐야 할 식물이다. 환경부 지정 멸종위기식물 중 하나이자, 여강에 자생지가 남은 세계 유일의 희귀식물이기 때문.

    은빛의 금강초롱꽃도 한국에서만 자라는 특산식물이기에 가을에 눈여겨봐야 한다. 응달진 산골짜기 시냇가에서 수줍게 자라는 노란색의 왕씀배도 가을이면 이곳에서 볼 수 있다. 봄철에는 깊은 산속에서 가끔씩 자라는 귀한 식물 백작약이나 한국 숲에서만 자라는 희귀식물 금붓꽃, 여름에는 뒤집어진 꽃잎이 특이한 희귀식물 솔나리도 신기한 구경거리로 다가올 것이다.

    황학산수목원에서, 자연이 우리에게 준 것들에 비해 우리가 자연에게 행한 것들을 생각하는 계기를 가져보자. 환경을 위한 작은 실천을 하려는 마음가짐을 갖는 것만으로도 이곳을 찾은 이유는 충분하다.

    조경이 잘 조성된 황학산수목원 입구

    위치 : 경기 여주시 황학산수목원길 73
    입장료 : 무료. 숲 해설 프로그램은 예약 필수(화~목요일에 가능)
    문의 : 031-887-2745

  • 다양한 석상이 전시된 목아박물관 야외 공원 전경
  • 예술이 된 전통목공예 전시장

    목아박물관 - 문화관광부 제28호 등록 전문사립박물관
    장인의 나무 사랑으로 태어나다

    나무에 새 생명을 불어넣듯 하나의 아름다운 목각 예술 작품을 탄생시키는 곳, 목아박물관은 여주 강천면에 위치해 있다. 입구 대문부터 존재감을 뿜어내는 목아박물관은 거대한 돌이 단으로 쌓인 대문이 손님을 맞이한다. 다른 한편에는 이전에 쓰이던, 나무로 된 거대한 전통 맞이문이 있는데 거북이 형상을 한 나무 자물쇠 하나만으로도 목각 예술의 웅장함을 드러낸다.

    목아박물관은 국가무형문화재 제108호 목조각 장인 목아 박찬수 선생이 1989년에 세운 사립 박물관이다. 동양 최초의 불교 박물관으로 문을 열었고, 불교미술에 기반한 한국 목조각 문화의 아름다움을 대중적으로 알리고자 지었다. 개관 시에는 목아불교박물관으로 불렸지만 이후에는 종교의 한계에서 벗어나 목각 예술의 본질에 집중하겠다는 의지로 이름을 바꿔 달았다.

    박찬수 선생의 호 목아(木牙)는 나무에 새 생명을 싹틔운다는 뜻으로, 나무를 하나의 목각 예술 작품으로 탄생시키겠다는 의지를 담고 있다. 나무를 작품의 주 소재로 사용하는 만큼 박찬수 선생의 나무 사랑은 특별하다. 공간 곳곳에는 그 자체로 수려함을 뽐내는 각종 수목이 자리해 야외 조각 공원의 여러 가지 석상, 동상과 어우러진다. 더불어 목각 다리는 연못의 경치를 완성하고 예수상과 성모 마리아상, 단군상까지 전시된 이곳은 범세계적인 공간이라는 느낌을 갖게 한다.

    작품을 만들 때는 오동나무나, 자작나무, 느티나무 등 나무의 고유의 성격에 따라 조각이 달리 나온다고 한다. 나무의 결을 잘 읽고 성격을 살려 조각하는 내공이 필요하다고. 목각에 오랜 세월을 바친 내공이 바탕이 됐기에 일반적인 방법처럼 나뭇조각을 접붙이지 않고 수백 년 된 거대한 나무를 통째로 조각하는 오라를 뿜는 장인으로 우뚝 섰다.

    목아박물관의 모든 현판과 주련은 ‘향기로움’, ‘마음의 문’, ‘큰 말씀의 집’ 등 한자가 아닌 한글로 되어 있다. 여주에 세종대왕의 능을 모신 만큼 한글 사랑을 표현하고 싶은 박찬수 선생의 뜻이라고.

    ‘향기로움’의 누각은 나무 자재를 인위적으로 다듬지 않고 자연의 나뭇결 그대로 기둥을 세웠다. 불사존 꼭두와 종을 처마에 달아 풍경 소리마저 그 자체로 완성된 예술 작품이다. ‘마음의 문’에는 산청약초축제를 대표한 초대형 허준 목조각상을 비롯해 동판으로 만든 보살상, 아름다운 글귀를 적은 주련 등이 조화롭게 배치돼 있다. 오백나한상과 불교 경전을 넣은 책장의 축을 돌리는 윤장대, 보존물이 있는 ‘큰 말씀의 집’은 절 내부를 그대로 옮겨놓은 듯, 그 세밀함과 지극한 정성이 느껴지는 공간이다.

    큰 말씀의 집, 절이 아닌 재현된 목조각 작품
    목각 예술관, 그 자체로 보물이 되다

    목아박물관은 보물 3점을 포함해 무려 6만여 점의 다양한 유물을 소장하고 있는데 그 면면이 국립박물관에 버금가서 놀랍다. 박찬수 선생이 자료 조사와 연구차 사비를 털어 하나씩 수집한 것이라고. 미타참법을 담은 보물 제1144호 예념미타도량참법, 경전과 교리의 내용이 그림으로 그려진 보물 제1145호 묘법연화경, 화엄경 중 하나인 보물 제1146호 대방광불화엄경 3점은 문화재로서 가치와 수준이 높은 만큼 목아박물관의 격을 올려준다.

    3층 전시관에 있는 너무나 해맑고 편안해 보이는 표정의 동자승 목조각은 매끄러움이 탁월해 목조각이라기보다는 실제 어린이와 같은 착각이 들 정도다. 한반도에서만 자라는 소나무로 제작된 ‘백제관음상’은 그 곡선의 아름다움을 수식하기 어렵다.

    특히 1989년 제14회 전승공예대전에서 대통령상을 수상한 ‘법상’은 수령이 500년이 넘은 느티나무로 제작됐다. 보살상과 촛대 등이 하나하나 섬세하게 조각돼 감탄을 자아낸다.

    오랜 시간 한길만 보고 살아온 박찬수 선생의 품성은 굳게 뿌리를 내리고 수백 년을 살아온 한 그루의 나무와 닮아 있다. 지금은 영월에 터전을 잡고 새로운 작품을 구상 중이라고 한다. 목아박물관은 연로하지만 그 열정만은 뜨겁고 꾸준한 목아 박찬수 선생의 정신이 오롯이 배어나는 공간이다.

    목아 박찬수 선생의 목조각 예술품

    위치 : 경기도 여주시 강천면 이문안길 21
    입장료 : 개인 5천 원. 월·화요일 휴무
    문의 : 031-885-9952

    * 취재에 도움을 주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문화 해설사 손경희 님, 여주시 일어 통역사 이남희 님, 종손 윤중진 님·윤홍길 님, 숲 해설사(다울숲) 김정희 님·이현우 님, 학예연구사 김혜빈 님·김완준 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