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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야기 둘. 여주 人

    맛있는 음료 ‘추’와
    인연 ‘연’이 만나니

    추연당 이숙 대표

    예로부터 사람들이 모인 곳에는 술이 빠지지 않았다. 더러는 술이 사람들을 부르기도 한다.
    “자네 집의 술 익거든 부디 날 부르시소”라는 조선 후기 문신 김성최의 시조도 있지 않은가.
    술로 소중한 인연을 맺고자 한다는 추연당의 이숙 대표도 좋은 것을
    이웃과 나누려 했던 우리의 문화를 전하려는 마음이 크다.

    글 박영임(자유기고가) 사진 김성재(싸우나스튜디오)
    • 추연당이 생산하는 전통주
  • 술은 나눠야 제맛이죠

    어른들 몰래 꼬들꼬들한 고두밥 훔쳐 먹는 재미는 어린 시절 이숙 대표에게 최고의 낙이었다. 술을 짜내고 남은 술지게미를 화로에 지져 먹는 맛은 또 어떠한가. 술지게미만 먹어도 취해 곯아떨어지기 일쑤였지만 술 빚는 날만 꼽았다.

    “집에 술광이 따로 있었어요. 1년 내내 제사가 끊이지 않는 종갓집의 큰 살림을 도맡으셨던 할머니는 술광에 늘 술을 가득 채워놓으셨죠. 제사상에 올릴 술이 떨어지면 안 되니까요. 할아버지는 어린 저를 위해 술광에 오르기 좋도록 단을 하나 만들어주셨어요. 그래서 술독에 귀를 대고 뽀글뽀글 소리가 올라오는 걸 가만히 듣곤 했죠.”

    술에 대한 이숙 대표의 추억은 정이 넘쳐 출렁이는 술잔처럼 차고 넘친다. 가을걷이가 끝날 무렵이면 앞마당에서 풍악을 울리며 한바탕 잔치가 벌어졌다. 인심 좋은 할머니는 동네 사람들을 위해 술광을 활짝 열고 그해 담은 술과 떡을 대접했다. 그래서 술은 때마다 일부러 넉넉히 빚었다. 그렇게 동네 사람들과 술을 나누며 잔치를 벌이며 보낸 유년 시절이 있기에 이숙 대표에게 술은 나눔이다.

    “술이 익으면 어떻게 해요? 음식을 해서 사람들과 나눠야죠. 어찌 혼자 먹고 말겠어요. 술을 보면 좋아하는 사람들이 생각날 거 아니에요? 그러면 만나고 싶고 나누고 싶고 그런 거죠. 그때 그들은 공짜 술이니 무작정 좋아서 ‘맛있다’, ‘그 손 참 대단한 손이다’라는 칭찬의 말로 저를 한껏 추켜세우죠. 그럼 저는 황홀경에 빠지고 맙니다.”

    이미 동무 여럿과 술잔을 기울이고 있는지 이숙 대표의 얼굴에 화색이 돌며 웃음이 절로 배어 나왔다. 그녀는 말을 이어나갔다.

    “그렇게 술을 나누는 것이 인연을 이어가는 것이라 생각해요. 그래서인지 제 술을 먹은 사람은 저와 인연이 쉽게 끊어지지 않죠. 그래서 주변에 사람이 많은 편입니다. 술을 나누면 만남이 이어지니까요.”

    • 전통주 효모
    여주의 쌀과 물, 공기로 탄생한 여주의 술

    그리하여 여주시 가남읍 금당리길에 자리한 양조장 이름을 ‘추연당’이라고 지었다. 맛있는 음료 ‘취(䣯)’자에 인연 ‘연(緣)’자. 이름하여 ‘맛있는 음료로 인연을 맺은 집’이라는 뜻이다. 옥편을 뒤적이며 이숙 대표가 세상에서 가장 좋아하는 두 자를 찾아 지은 이름이란다. 어찌 보면 세상 모든 만남이 놀라운 인연이다. 문득 이숙 대표가 이곳 여주 땅과 맺은 인연은 어떻게 시작됐을지 궁금해졌으나 우선 그 전에 술을 빚게 된 연유부터 들어보았다.

    “예전에는 일본의 유명 천연 비누를 백화점 등에 독점 판매했습니다. 그러다 마흔이 넘으면서 남의 것을 파는 일은 그만두고 제가 직접 만드는 일을 해야겠다고 생각했죠. 나만이 할 수 있는 것, 그것도 자랑스럽게 할 수 있는 것, 설레는 일을 하고 싶다는 열망이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차올랐습니다.”

    잊혔던 옛것들이 갑자기 애상을 불러일으킬 때가 있다. 그즈음 유난히 눈에 밟히고 가슴을 뭉클하게 하는 것이 유년 시절에 할머니가 만드시던 음식과 술이었다. 그래서 전통 음식을 배우기 시작한 이숙 대표는 내친김에 2016년 농업회사법인 추연당을 설립했다. 천연 비누 유통·판매를 하다가 양조장이라니 전격적인 방향 전환에 두려움은 없었을까? 이숙 대표에게는 첫사랑을 다시 만난 듯 설레기만 한 나날이었다고 한다.

    “전통 음식을 배우기 시작하면서 멈췄던 심장이 다시 뛰는 것 같았어요. 옛날 할머니의 추억이 떠오르니까 날마다 심장이 뛰는 거예요. 혼자 책을 보며 연구하고, 새로운 아이디어가 떠오르기도 해 술을 배울 때쯤에는 하루에 3시간 이상 잠을 못 잤어요. 그런데 오히려 그것을 즐겼죠.”

    이쯤에서 드디어 하고 많은 곳 중 여주에 추연당을 연 이유를 물어봤다. 사실 이숙 대표의 여주 사랑은 술 사랑 못지않다. 여주 쌀을 고집하는 것은 물론이며, 추연당의 증류주 이름을 여주의 둘레길인 여강길에서 따 소여강(소주+여강)이라 짓고 코스별 색깔이 다른 여강길에서 영감을 얻어 도수별로 파란색, 초록색, 금색으로 라벨 색을 달리했다. 여주의 쌀과 물, 공기로 빚었으니 이름에도 여주를 담고 싶었던 것. 또한 세종의 고장인 여주를 알리고자 ‘이도’를 상표출원해 육포와 정과를 판매하기 시작했다.

    “술도 음식입니다. 사람이 먹는 음식은 건강한 재료와 건강한 마음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전 쌀로 술을 빚는 사람이니 당연히 좋은 쌀이 있는 여주에 터를 잡은 거죠. 여주 쌀만의 감칠맛이 있잖아요. 그리고 저는 여주가 세종대왕을 비롯해 문화적인 이야기가 많은 곳이라고 생각합니다. 술은 일종의 문화산업이니 문화적 자산이 풍부한 여주는 술을 빚기에 제격이죠.”

    • 문화적 자산이 풍부한 여주는 술 빚기에 제격이라고
      이야기하는 이숙 대표
  • 술 익으면 놀러 오세요

    추연당의 전통주는 모두 손으로 만든다. 그중 고문헌의 청주 제조법을 오양주(다섯 번 담금) 방식으로 재현한 ‘순향주’는 여주 쌀과 우리 토종밀인 앉은뱅이밀로 만든 누룩, 지하수로만 빚는다. 그리고 100일간의 발효와 숙성을 거쳐 완성된다. 순향주는 2020년 대한민국 우리술 품평회에서 우수상을 수상했다. 2021년에는 손막걸리인 ‘백년향’도 최우수상을 수상했다. 추연당의 전통주가 국내 최고 권위의 술 품평회에서 2년 연속 트로피를 거머쥔 셈이다. 때마침 이러한 영광은 경영난으로 폐업을 고민하던 이숙 대표의 마음을 다잡아주었다.

    “우리나라에도 귀한 술이 있다는 것을 알리고 싶었어요. 그래서 여주의 멥쌀로 오양주에 도전했는데 1년 동안 원하는 맛이 나오지 않아 만드는 족족 폐기했죠. 종일 가까이서 살펴야겠다는 생각으로 그때 집도 서울에서 여주로 옮겼어요. 순향주는 이리도 어렵게 완성된 술인데 드디어 그 노력을 인정받은 것 같아 기뻤습니다. 사정은 여전히 어렵지만 추연당과 순향주, 백년향, 소여강이 점점 많은 이들에게 알려지고 있으니 다시 힘을 내기로 했어요.”

    이숙 대표에게 기운을 북돋워주는 이들은 또 있다. 어느 여름날 목을 축여야겠다며 대뜸 막걸리 한 사발을 요구하던 농사꾼 이웃들. 그해 가을이면 문 앞에 무며, 양파며, 찹쌀 같은 수확물이 무심히 놓여 있곤 하니 이러한 맛에 이숙 대표는 매일 술을 빚지 않을 수 없다.

    “어차피 혼자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이 아니잖아요. 어울려 살아야죠. 술도 그래요. 술을 마시려면 잔이 있어야 하잖아요. 그래서 여주에서 도자기를 만드는 박재국 도예가에게 부탁해 전용 잔과 접시를 만들었습니다. 예술가들과의 협업뿐 아니라 여주 시민들과도 함께 술문화를 만들어나가고 싶습니다.”

    • 이숙 대표는 여주의 쌀과 물, 공기로 빚은 술 이름에도 여주를 담았다.

    이러한 이숙 대표의 바람은 이미 싹을 틔웠다. 2021년 9월 여주세종문화재단과 함께 ‘여주 오곡으로 빚은 가양주 품평회’ 시상식을 개최한 것. 일반인을 대상으로 열린 본 품평회에는 195건이 접수돼 16대1의 경쟁률을 기록, 가양주에 대한 일반인의 열띤 관심을 실감할 수 있었다.

    “여주세종문화재단 덕분에 첫 대회를 훌륭하게 치렀습니다. 저 혼자서라면 어려웠겠죠. 앞으로 여주의 특산물과 문화를 알릴 수 있는 체험 마을도 만들어보고 싶어요. 저희 전통주를 비롯해 쌀, 고구마, 땅콩 같은 먹거리에 문화유적지, 트레킹 코스, 도자기 체험 등 머물며 체험할 수 있는 것이 많은데 여주를 거쳐 가는 곳으로만 인식하는 것이 안타깝습니다. 작은 것부터라도 시작해보려고요.”

    사람들을 불러 모으는 데 일가견이 있는 추연당의 술이 각지의 사람들을 여주로 초대하는 날이 그려진다. 그날엔 온 마을에 술 익는 향이 진동하며 흥겨운 잔치가 벌어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