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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야기 둘. 여주 人

    여주 잠사업의
    산증인

    경기실크 이우린

    1960~1980년대 여주는 경기도 누에의 25%를
    생산할 정도로 국책사업이었던 잠업의 중심지 역할을 했다.
    잠업은 경제개발5개년계획의 큰 축이었고,
    여주 4,000여 가구의 수입원이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 경기실크가 있다. 1963년부터 경기실크에 몸담았던
    이우린 씨는 잠종장 잠업 기술 수료생에서 경기실크
    관리자가 되기까지 경기실크와 평생을 함께했다.
    잠업 분야의 산 역사이자 잠업 부흥기를 이끈 선구자.
    이우린 씨가 걸어온 길을 따라가본다.

    구성 이현주(편집실) 사진 제공 여주세종문화재단
    • 이우린 씨가 제작한 누에고치 조형물 앞에서
  • 잠업이 외화벌이의
    중추적 역할을 했던 거예요

    이우린 씨는 1942년 경기도 포천시 소흘읍 무봉리에서 태어났다. 전쟁으로 폐허가 된 국토와 어려운 경제상황 속에서 학창 시절을 보낸 그가 잠업과 인연을 맺은 것은 군대 제대 후부터였다.

    “제대하고 나와서 잠업 쪽으로 연관이 된 이유는 돼지를 집에서 키우고 그러면은 분뇨 같은 것도 나오고 이렇지 않습니까? 그러면 그걸 갖다가 뽕나무밭에 주고 이러면은 뽕나무 성장에도 좋고, 일거양득이 아닌가 싶어가지고….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차제에, 그 경기도 잠업시험장에서 잠업 기술 연수를 받게 됐어요. 그때가 한참 잠업이 부흥되는 그 시점이거든요. 잠업이 외화벌이의 중추적 역할을 했던 거에요.

    농촌진흥원에서 잠업 기술교육을 받은 이우린 씨는 1967년 경기제사공업주식회사에 입사했다. 경기제사공업주식회사는 경기실크의 전신으로, 1963년 여주 하리에 ‘경기제사공업주식회사 부설 경기 잠업연구소’와 ‘한국잠사기계주식회사’를 열었고, 1970년에 경기잠업연구소 직조공장을 세웠다. 1975년에는 ‘경동제사’로, 1982년에는 현재 알려진 ‘경기실크’로 이름을 바꿨다.

    입사 후 1970년대 이우린 씨는 생사 품질 향상에 성과를 거둬 무주에서 진행된 생사 품위 향상 관련 세미나에서 최우수상을 받게 된다. 수상을 계기로 과장으로 진급도 했다. 사실 그의 진급 뒤에는 각고의 노력이 숨어 있다. 회사에 꼭 필요한 사람이 되겠다고 각오하고 스스로 자기 계발 3년 계획을 세워 땀 흘린 것.

    “세미나를 발표하려면 원고를 쓰고 그래야 되잖아요. 차트도 그리고 뭐 그런 것을 잘했나 봐요. 발표를 하고 막 이러기 시작했죠. 내가 좀 올라갈 수 있었던 계기가 세미나 덕분이에요. 세미나 발표 덕분에 사장이 인정을 하고 나를 과장으로 승진시키게 된 거죠. 그래서 어쩌면은 성공을 했습니다. 제가 알기로 71년도에 군수 월급이 3만 원인가 뭐 아마 그 선이었던 거 같아요. 그거보다도 더 많이 받고 일했었으니까 신이 나긴 나더라고요.”

    이우린 씨처럼 1970년대 중반 경기실크도 이른바 전성기였다. 수출 백만불을 달성하고 경기도 잠업 생산량의 4분의 1을 차지했을 정도다. 이우린 씨는 매사에 목표를 세워 최고의 품질의 제품을 생산하기 위해 애썼다. 예를 들어 A등급을 받아야 수출이 가능한데 현실이 그렇지 못한 경우, 실 켜는 기술부터 온도 관리, 건조 시간 늘리기 등을 통해 품질을 개선해 기어코 2A 수준으로 높여 수출을 성사시켰다. 게다가 3A 수준까지 높여 사장에게 격려금도 받고 승진도 했다고.

    “고치를 말리는 거부터 잘해야 곰팡이가 안 납니다. 건견을 잘해야죠. 실의 상태를 보는 걸 사조반 검사를 한다고 그럽니다. 이게 450m를 감아가지고 사조반을 보면 무늬가 똑같으면은 실이 잘 켜져 있는 거고. 어떤 데는 하얗고 어떤 데는 거무스름하고, 거무스름한 데는 실이 가늘다는 얘기거든요. 무늬가 고르지 않으면 검사에 나와요. 사조반에서 이렇게 보면은 저 소절이 있고 또 대절이 있어요. 대절. 그러니까 큰 마디가 있어요. 소마디가 있고 큰 마디가 있어요. 소마디는 소마디대로 검사를 하고 큰 마디는 큰 마디대로 검사를 하거든요. 이게 100점에서 페널티를 줘나가는 거예요. 그러면 90점 이상이라야지. 90점 이하면은 안 되는 거거든요. 그런 과정을 보면서 신경을 쓰는 거죠. 자견의 기술도 있어요. 고치 삶아서, 삶는 것도 기술이잖아요. 밥 짓는 것도 기술 아닙니까.”

    • 1971년 농수산부장관상 수상 장면
  • *이우린 씨 이야기는 《구경기실크 유휴공간 문화재생사업 아카이브》와 여주 생활문화 구술사업 총서, 《여주를 담다 삶을 기록하다》 산업시설 관계자 편에서 발췌·수록했습니다.

  • 여주 세종병원 있는 데까지
    다 뽕나무밭이었거든요

    그렇게 능력을 인정받은 이우린 씨는 1970~1980년대 청평, 괴산, 음성, 용인 등으로 지역을 옮겨가며 부장직으로 근무했다. 1980년대 후반에서 1990년대 중반에는 해외 잠업 기계 설치와 기술 지도를 위해 네팔, 베트남, 일본, 이란, 태국 등 해외 각지로 출장을 다녔고, 베트남에는 3개월간 머물기도 했다. 그렇게 전국은 물론 세계를 돌며 잠업을 경험했지만 유독 여주의 잠업 생산량이 좋았다고 평가한다.

    “제 생각에는요, 여주 토양이 사질 양토거든요. 사질 양토. 물 빠지기도 좋고 이래가지고 뽕나무가 잘 자랄 수 있는 토지를 가지고 있어요. 그러니까 여기가 양잠이 많이 활성화됐다고 봅니다. 저쪽 여주 세종병원 있는 데까지 다 뽕나무밭이었거든요.”

    여주의 좋은 땅이 잠업을 성하게 했다면 그렇게 발전한 잠업은 여주 경제 활성화에도 영향을 미쳤다. 이우린 씨는 그것을 두 눈으로 목격했다.

    “시장경제를 활성화시킬 수 있는 그 모멘트가 된 것 같습니다. 여기. 청평도 마찬가지예요. 옷 가게도 생기고, 화장품 가게도 생기고 나중에 그러더라고요. 그렇게 해서 근데 여자들이 다 옷 안 입고는 못 사니까. 그런 게 그렇게 활성화되더라고요. 제가 시장통 가면은 아모레 상회도 생기고, 한국화장품 상회도 있고 막 이렇게 생기더라고요. 그러니까 여기서 빠져나가는 돈이 아마 여주 시내에서 먹고살 수 있는 그런 재원을 마련해주지 않았겠느냐. 이런 생각이 들어요”

    • 경기제사 청평 공장
    • 자동조사기가 있는 옛 경기실크 공장 내부
    기계 만들면서
    손가락이 이렇게 잘리고 그랬습니다

    우리나라의 잠업은 1980년대부터 사양길에 접어들기 시작했다. 이우린 씨는 전성기부터 쇠퇴기까지가 어제 일인 양 눈에 선하다.

    “71년도 후반기부터 소위 살맛 나는 거죠. 그죠 그냥 일만 하고 애들은 또 뭐 옷도 잘 입혔죠. 규모도 직원이 300여 명일 적도 있었어요. 근데 80년 후반 되면서 안 되기 시작을 하다가 90년도 되니까 완전히 안 되는 거야. 그런 과정 속에서 이제 한국 제사 공장이 다 문을 닫게 되고. 그렇게 됐죠. 그래도 실크 계통은 10년은 괜찮았어요. 제가 들어와서 10년 동안은 괜찮았다고. 한국 경제에도 그런 IMF 과정 속에서도 굉장히 어려웠잖아요. 마찬가지예요. 하여튼 나중엔 중국 실을 사다가 기계를 가지고 연사를 생산해서 판매를 하고 이랬었는데 그마저도 안 되고 여기 연사 기계를 갖고 나가서 ‘오학’에서 강 씨가 공장을 했어요. 거기서 하다가 개성공단에서 연사를 생산하고 그랬거든요. 그런데 1차 개성공단이 문을 닫잖아요. 다 철수를 하고 말았지요.”

    1960년대 정부의 잠업 장려에서 시작해 1970년대 호황기를 맞았던 잠업이 1980년대 석유파동과 중일 국교 정상화 및 환경오염으로 사양길에 접어들었다. 그럼에도 그는 잠업에 대한 열정을 놓지 않았다. 세계에서 유일하게 남아 있는 기계, 자동조사기를 개발한 것이다. 1996년에 설치한 신형 자동조사기는 현재 경기실크 공장에 남아 있다. 작동을 시험하다가 장갑이 쓸려 들어가 손가락을 다치게 만든 기계다.

    “제가 기계를 만든 사람인데요, 우리 여기 신형 자동조사기라고 이거를 개발해서 만든 거거든요. 이 기계 만들면서 손가락이 이렇게 잘리고 그랬습니다. 이게 세계에서 모델이 이것밖에 없어요. 이거를 만들어 놓고 우리 회장님이시죠. 그분은 돌아가시고, 이게 94년도에 개발해가지고 96년도에 여기에 설치했습니다. 지금 저 끝에 건물에 있거든요. 세계에서 하나밖에 없는 모델입니다.”

    • 옛 경기실크 공장 부지

    이우린 씨는 수십 년 동안 잠업 분야에서 관리자 역할로 국내외 기계 설치 기술을 지도하는 데 힘썼으며 경기실크 주식회사가 문을 닫기까지 일했다. 그는 현재 은퇴했지만, 잠업에 대한 열정과 애정은 변함이 없다.

    “여기에 뽕나무가 있어야 된다고 봅니다. 잠두봉공원이라는 게 있잖아요. 거기에도 뽕나무 같은 거를 심어서 그늘을 지게 하고 뭐 이런… 나는 가보지 못했는데, 그런데를 다 보면서 이게 문화시설 쪽으로 잠업하고 관계된 것들이 한국에 많이 있어요. 그러니까 여기도 나중에 해놓으면은… 원주시 호저면 고사리에도 누에 관련 공간이 있네요.”

    잠업 멘토로서 이우린 씨를 능가할 사람이 있을까? 경기실크 역사의 산증인, 여주의 경기실크가 한국의 잠업 생산 거점이라 할 만큼 경제성장을 주도하며 공헌한 것을 기억하는 이. 그가 오래도록 그 눈부셨던 역사를 증언해주길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