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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혼천의(국립중앙박물관 소장)
  • 이야기 둘. 세종 이야기

    조선의 하늘을 가진
    세종의 꿈,
    오늘에 되새기다

    세종의 천문학적 혜안

    바야흐로 우주개발 시대다. 우리나라 역시 세계 우주 강국 중 하나로
    우주로 향하는 노력을 꾸준히 이어오고 있다. 사실 한국은 과거 천문학 선진국이었다.
    바로 세종 덕분이다. 우리 역사에서 세종만큼 천문학을 발전시키기 위해 애쓴 왕도 드물다.
    세종은 천문 사업에 왜 그토록 애썼을까? 세종의 위대한 천문 프로젝트를 살펴본다.

    글 정성희(실학박물관장)
    • 혼천전도(渾天全圖)(국립민속박물관 소장)
  • 세종은 우리 역사에서 한글을 창제했고, 대마도를 정벌했으며, 집현전을 설치해 고금의 문헌을 수집하는 등 실로 셀 수 없을 정도의 많은 업적을 남긴 왕이다. 그 가운데서도 조선의 천문학 수준을 세계 최고의 위치에 올려놓은 업적은 한글 창제에 견줄 만큼 당시로는 위대한 성과였다고 평가하고 싶다.

    특히 천문과 관련한 세종의 위업 중 하나가 이른바 ‘간의대(簡儀臺)’ 사업이다. 간의대는 경복궁에 지은 세종의 왕립천문대를 말한다. 간의대는 세종 대에 이룩한 과학기술의 핵심이자 당대 동아시아 최고의 천문대였다. 세종은 왕립천문대를 만들고 난 뒤 “나라는 백성을 근본으로 삼고, 백성은 먹는 것을 하늘로 삼으니 농사는 의식의 근원이고 왕정의 급선무이다”라고 했다. 유교적 민본주의의 중심에 농업이 있었고 그 배경에 천문학이 있었던 것이다. 경제적으로 풍요로운 나라를 만드는 데 천문학이 중요하다는 것을 세종은 간파하고 있었다.

    한글 창제도 그렇지만 천문학의 발전 또한 세종의 주도로 이루어졌다. 우리 역사에서 세종만큼 천문학을 발전시키려고 애쓴 왕도 드물다. 세종은 천문 사업에 왜 그토록 애를 썼을까? 당시 국가사업으로서 천문 사업은 그리 시급한 것도 아니었고, 사업 예산도 천문학적으로 많이 들었다. 더군다나 당장 백성에게 어떤 혜택이 돌아가는지도 불확실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종은 왜 천문학에 관심을 가졌을까?

    조선의 천문대를 만들자

    세종은 중국 제도에서 벗어나 조선에 맞는 독자적인 천문 관측을 수행하고 싶었다. 그래서 하늘을 관측하는 기구를 만들고자 한 것이다. 이를 위한 준비는 다 됐다. 이미 장영실을 비롯한 천문가들을 중국에 보내는 등 새로운 천문 기기를 제작할 기초를 갖춘 세종이었다.

    학문을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해당 분야에 대한 이론적 탐색과 함께 사업을 담당할 수 있는 전문가가 필요한 법이다. 세종은 학문 연구의 기반을 조성하고 연구 인력을 양성하기 위해 집현전을 만들고 경연을 적극 활용했다. 세종은 경연 중에 정인지(鄭麟趾, 1396~1478)를 바라보며 “우리나라 제도가 항상 중국을 따랐으나 유일하게 하늘을 관측하는 기구만이 이를 따르지 못했다. 경이 대제학 정초와 함께 천문을 연구하여 관측하는 기구를 만들면 좋겠네”라고 하여 천문대 건설 사업을 추진했다.

    공식적으로 천문 사업을 천명했지만, 사전에 아무런 준비 없이 시작할 세종이 아니었다. 세종은 즉위 초부터 왕립천문대를 건설할 원대한 꿈이 있었다. 조선의 왕이라면 제왕의 과학이라 불리는 천문에 관심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 일찍이 태조 이성계가 〈천상열차분야지도〉라는 이름의 천문도를 제작했고, 태종도 천문에 관심이 많아 왕실 천문대를 세우고자 했다. 그러나 두 사람 모두 뜻을 이루지 못했다. 많은 시간과 인력, 그리고 경제적 부담이 컸기 때문이다.

    • 앙부일구(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천문대는 백성의 농사를 위한 것

    세종은 궁궐에 간의대를 설치하는 궁극적인 목적은 하늘의 변화를 살펴 농사를 짓는 백성에게 정확한 때를 알려주기 위해서라고 천명했다. 천문 사업은 오로지 백성을 위한 것이라는 의미이다. 간의대의 건설은 천문학적 의미 외에도 또 다른 상징성이 있었다. 하늘을 공경하고 재앙을 막기 위한 목적이 있었다. 이는 법궁인 경복궁을 완성하기 위한 중요한 요소이기도 했다.

    간의대 건설은 천문 관측을 통해 그 현상을 정사에 정확히 반영하는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서였다. 간의를 만들어 관측하려면 먼저 간의대를 만들어야 했다. 간의대를 제작하는 데는 대략 1년여의 기간이 걸렸다. 간의대는 경복궁 경회루 북쪽 편에 지어졌다. 간의대의 크기는 높이 31척, 길이 47척, 너비 32척이고 대(臺) 위에 돌난간이 있었다. 이것을 다시 미터로 확산하면 높이는 약 6.4m, 길이는 약 9.7m, 너비는 약 6.6m에 달한다. 높이가 6.4m이면 아파트 1층의 높이가 대략 3m 내외이므로 2층 정도 되는 높이다.

  • 정성희
    전통 천문학에 관심이 많아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에서 〈조선 후기 우주관과 역법〉으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다년간 서양 천문학의 전래와 조선시대 우주관의 변화에 대한 연구를 진행했으며 《우리 조상은 하늘을 어떻게 이해했는가》, 《세종의 하늘》을 비롯한 많은 책을 썼다. 현재 실학박물관장으로 재직 중이며 경기도문화재위원으로 있다.

  • 세계 최고의 천문대를 완성하다

    간의를 제작하라는 세종의 명을 받은 예문관 제학 정인지와 대제학 정초는 옛날 천문 서적을 검토하고 조사하는 일을 맡았다. 실제 간의를 제작하는 일은 중추원사 이천과 호군 장영실이 맡았다. 일찍이 장영실은 세종의 명으로 명나라에서 곽수경의 간의를 익히고 돌아왔다. 간의 제작을 실질적으로 주도한 인물은 장영실이었다. 장영실은 나무로 간의를 만들고 서울 한양의 북극고도를 측정했다. 장영실은 나무로 만들었던 천문의기를 하나둘씩 구리를 녹여 만들어나갔다.

    1432년(세종 14년) 간의대 건설을 시작으로 세종의 천문 사업은 총 7년 프로젝트로 진행됐다. 이듬해인 1433년에 간의대가 축조되고, 1434년에 자격루와 앙부일구, 1437년 일성정시의, 1438년(세종 20년)에 흠경각 옥루 등이 완성되면서 왕립천문대 사업이 종료됐다. 1420년 천문에 본격적으로 관심을 두기 시작해 18년 만에 오랜 꿈이 실현된 것이다.

    세종 대에 지은 간의대는 조선 전기 동안 천문대로서 운영됐다. 간의대는 영국의 그리니치천문대나 중국의 고관상대보다 건립 연대가 앞선 왕립천문대였다. 관측기기의 규모 또한 그리니치천문대나 고관상대에 뒤지지 않았다고 하니 당대 최고의 천문대라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세종 대 왕립천문대의 건설은 궁극적으로 정확한 시간을 관측해 백성에게 이를 알려주는 것으로 귀결됐다. 정확한 시간은 정확한 시계를 만드는 것에서 출발한다. 세종 대에는 자격루를 비롯해 앙부일구, 현주일구, 일성정시의 등 이전 시대에 비해 한 차원 다른 다양한 시계가 제작됐다. 아울러 이를 위해 간의대와 같은 왕립천문대가 건설돼 한양을 위도로 정확한 천문 관측이 이루어졌다.

    세계 최고의 과학 국가를 만들다

    동아시아의 천문학이 13세기 원나라 곽수경에 의해 꽃을 피웠다면 15세기에는 세종과 장영실, 이순지와 김담 등에 의해 조선에서 꽃을 피웠다. 왕권이 크게 약화됐던 고려는 원나라의 혁신적인 과학을 받아들일 여유가 없었다. 새로운 왕조인 조선이 들어선 뒤 과학에 관심이 많은 세종대왕의 주도로 천문학에서 대도약을 이룰 수 있었다. 영국의 저명한 과학사가 조지프 니덤(Joseph Needham)은 “15세기 조선은 당시 세계에서 가장 첨단의 관측의기를 장비한 천문기상대를 소유했다”고 평가했다.

    영국 케임브리지대학교 교수였던 니덤은 “한국은 15세기 초와 17세기 초에 천문학이 큰 도약을 이루었다”라며 세종대의 과학 발전을 높이 평가했다. 우리 역사에서 15세기는 세종이 통치하던 시기이고, 17세기 초는 인조와 효종이 통치하던 시기이다. 전자가 자체적인 노력으로 천문학이 발전했다면, 후자는 서양 천문학이 전래되면서 이를 계기로 조선의 천문학이 발전했다.

    15세기 조선을 세계 수준의 과학 국가로 만든 세종은 1418년 부왕인 태종으로부터 왕위를 양위받아 조선왕조 제4대 국왕으로 즉위했다.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개창한 지 27년 만이었다. 태조가 조선을 개국한 창업 군주라면, 태종은 수성 군주였다. 세종 역시 수성 군주임을 자처했지만, 선대 왕들의 업적을 이어받아 조선왕조를 반석 위에 올려놓아야 했다. 그 구체적인 방법은 고전을 연구하고 고증해 이른바 예악(禮樂)으로 대표되는 유교 문물을 찬란하게 빛나게 하는 것이었다. 천문학의 정비는 이와 같은 유교 문물의 정비 과정에서 나온 것이었고 또한 그 중심에 있었다.

    • 성정시의(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멀지 않은 우주탐사의 꿈

    인류 역사에서 과학 문명의 발전은 누구나 진리라고 생각한 것을 뒤집는 데서 출발했다. 세종의 왕립천문대 건설, 갈릴레이의 지동설, 실학자 홍대용의 무한우주론 등은 기존의 생각을 전환시킨 ‘뉴패러다임(New Paradigm)’이다. 1969년 아폴로 11호의 달 착륙은 이러한 뉴패러다임에서 시작된 것이다.

    1969년 7월 21일, 미국의 우주인 닐 암스트롱은 인류 최초로 달에 착륙했다. “한 인간에게는 작은 한 걸음이지만 인류에게는 위대한 도약이다.” 달에 첫걸음을 내딛는 순간 내뱉은 암스트롱의 유명한 말처럼 그의 작은 걸음이 인류에게는 위대한 도약이었다. 암스트롱 이후로 우주를 향한 인류의 도전은 계속됐다. 이제 인공위성으로 태양계를 탐사하거나 인간이 우주선을 타고 우주로 나가는 것은 어렵지 않게 됐다. 심지어 사람이 며칠씩 우주정거장에 머물며 생활하는 것도 가능해진 시대다.

    달 탐사를 비롯한 우주개발을 모든 나라가 꿈꾸지만 인공위성을 만들거나 우주인을 배출한 나라, 우주센터가 있는 나라는 손에 꼽힐 정도다. 우리나라는 2013년 1월 30일 역사적인 나로호 발사 성공으로 사실상 11번째 우주 강국이 됐다. 100kg급 나로과학위성(STSAT-2C)을 우리 힘으로 지구 저궤도에 쏘아 올리는 것을 목표로 시작한 나로호 개발 사업이 오랜 시간 끝에 결실을 본 것이다.

    2021년 10월 21일 순수 우리 기술로 만든 ‘한국형 발사체’ 누리호가 발사됐다. 비록 위성 모사체의 궤도 안착이라는 임무는 실패했지만, 이번 발사의 성공은 바야흐로 신우주 시대의 막을 여는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2022년 5월 누리호 2차 발사를 시작으로 2027년까지 차세대 소형 위성 2호, 차세대 중형 위성 3호, 11기의 초소형 군집위성 등 현재 개발 중인 인공위성을 누리호에 실어 우주로 올려 보낼 계획이라고 한다. 불굴의 집념으로 조선의 하늘을 가진 세종처럼 38만km를 향한 달 탐사의 성공도 머지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