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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야기 둘. 예술 교과서를 펴고

    당신이
    한 권의 그림책이 되듯

    책배여강

    여주에는 그림책으로 소통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림책을 통해 잊고 지내던 자신과 만난다.
    그리고 그렇게 한 권의 그림책이 된다. 강사와 어르신이 함께 배우며 그림책을 만드는
    책배여강의 박혜진 대표를 통해 자세한 이야기를 들었다.

    글 노윤영(편집실) 사진 제공 책배여강
    책배여강 강사의 지도 아래 삼합리 어르신들이 그림을 그리고 있다.
    • 직접 그린 꽃 그림에 수를 놓고 계신 어르신
  • 그림책이 어르신들의 삶과 만났을 때

    책배여강은 2012년 여주의 인문학 강사 모임에서 시작했다. ‘책배’는 책을 실은 배, ‘여강’은 여주를 관통하는 남한강을 뜻한다. 단체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책배여강은 멀리서도 보이도록 등불처럼 반짝 켜진 책으로 마을 사람들과 소통하는 인문학 모임이다. 인문학 및 예술 전공자들이 모여 다양한 공부를 진행하는 이 인문 공동체는 2015년부터 직접 여주 곳곳의 마을을 다니며 어르신들과 함께 그림책으로 이야기 나누고 있다.

    “우리가 배운 것들을 함께 나누고 싶었어요. 때마침 경기문화재단의 지역특성화 문화예술교육사업에 선정되면서 어르신들과 만날 기회가 생겼죠. 2019년부터는 여주세종문화재단과 함께하고 있어요. 어르신들에게 좋은 그림책을 읽어드릴 뿐만 아니라 함께 소통하면서 어르신들을 위한 그림책을 만드는 일도 하고 있어요.”(박혜진 책배여강 대표)

    하고 많은 책 중에 왜 하필 그림책이었을까? 박혜진 대표는 그림책이 어르신들과 만날 수 있는 훌륭한 매개체라고 말한다. 글이 그림과 어우러져 진입 장벽이 낮은 데다 함께 나눌 이야깃거리도 많다는 것이다.

    “처음 그림책을 가져갔을 땐 애들 보는 걸 왜 가지고 왔느냐며 치우라고 하셨어요. 그래도 우리는 꿋꿋이 들고 갔어요. 어르신들이 잘 아는 옛이야기가 담긴 그림책, 할머니나 할아버지가 주인공인 그림책, 어린 시절이나 고향이 떠오르는 그림책이었죠. 둥글게 모여 앉아 읽어드리면 처음에는 싫어하던 어르신들도 어느새 집중하고 계세요. 이야기에 빠져서 함께 웃고 나쁜 인물을 욕하다 보면 경계하던 마음은 자연스레 풀리고요. 그럴 때면 어르신들은 마음 한 자락을 슬며시 보여주십니다. 그림책과 어르신들의 삶이 만나며 새로운 이야기가 시작되는 거죠.”

    • 어르신이 직접 그린 그림과 글
    강사와 어르신이 함께 배우며 만드는 ‘인생 그림책’

    수업은 주제를 정해 그에 맞는 그림책을 가져가 함께 읽는 방식으로 진행한다. 하지만 때때로 떠오르는 이야기를 나누기도, 노래를 부르기도 한다. 틀에 얽매이지 않고 어르신들에게 맞춰 자유롭게 진행하고 있다. 커리큘럼은 크게 어르신들의 이야기 모으기, 모인 이야기에 맞춰 그림 그리기, 그림책 만들기로 구성돼 있다.

    “80세 이상의 연세 많으신 어르신 중에는 한글을 읽지 못하는 분들도 계세요. 그래서 먼저 어르신들의 이야기를 강사들이 받아 적어 글로 만들고, 그 이야기에 어르신들이 그림을 그리는 순서로 진행됩니다. 평생 처음 그림을 그려본다는 어르신이 많아요. 우리 강사들은 그분들이 떨리는 손으로 그려낸 그림이 얼마나 좋은지 모릅니다.”

    • 송촌3리 아미마을 작품 전시회

    책배여강은 그렇게 수업에서 나온 어르신들의 그림과 이야기들을 그림책으로 펴내고 있다. 그림 전시회와 북 콘서트도 진행하는데 이때마다 어르신들도 함께한다. 자신의 이야기가 책으로 나오고 전시회와 북 콘서트로 이어진다니, 어르신들에게는 각별한 경험이지 않을까?

    “우리가 만난 어르신 중에는 그 마을에서 태어나 그 마을 사람과 결혼해 평생 그곳에서만 살고 계신 분도 계세요. 그런 분들이 생전 처음 그림책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할 수 있다는 건 굉장히 중요한 의미가 있어요. 북 콘서트가 열리면 어르신들을 모셔오는데, 굉장히 뿌듯해하세요. 북 콘서트에 참여한 자제분들 중에는 어머니의 책을 구입하고 싶다고 문의하는 분들도 적지 않고요.”

    여주는 3~4년 전만 해도 ‘문화소외지역’으로 분류됐다. 하지만 여주세종문화재단이 설립되고 여러 문화예술 활동이 이어지면서 이제 여주에는 ‘문화의 꽃’이 활짝 피어나고 있다. 여주의 문해 교육사들은 책배여강이 만든 그림책을 어르신들의 한글 교육 때 자료로 사용하고 있고, 다른 지역에서도 책을 보고 문의하는 경우가 생겼다. 박혜진 대표는 그럴 때마다 자부심을 느끼는 것은 물론 책임감이 더 생긴다고 한다.

    “한 해 한 해 활동하다 보니 어느덧 여기까지 왔네요. 무엇을 이루겠다는 거창한 목표는 없어요. 다만 어르신들을 교육의 대상이나 수단으로 보는 자세는 경계하려고 합니다. 우리들 역시 어르신들의 삶과 이야기에서 많이 배우고 있거든요. 우리는 함께 성장하고 있어요.”

    여강이 묵묵히 흘러가듯 책배여강은 앞으로도 해오던 대로 어르신들과 함께 그림책을 만들어갈 예정이다. 하지만 그게 다는 아니다. 궁극적인 목표는 여주 시민 전체가 자신만의 이야기가 담긴 한 권의 그림책을 가지게 될 때까지 문화예술 전달자로서 역할을 지속하는 데 있다. 여주의 어린이와 청소년, 청년과 어르신 모두 세상에서 단 하나뿐인 나만의 그림책을 만든다는 것, 그리고 그들의 삶을 묵묵히 응원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 이보다 멋진 일이 어디 또 있을까?

    • 책배여강과 함께하는 삼합리 어르신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