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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야기 둘. 여주 테마 기행

    발길과 손길로
    돌에 새겨진 사연들

    파사성·풍운원

    단단한 돌에 인간은 수많은 염원을 새긴다. 유구하기를 바라는 마음과 함께.
    돌에는 이렇게 누군가의 기억들이 새겨 있다.
    오랜 세월을 견디는 돌처럼 오랫동안 기억해주기를 바라는 마음들이 새겨 있다.

    글 박영임(자유기고가) 사진 김성재(싸우나스튜디오)
    파사성의 위에서라면 왜군의 침입을 감시하는 데 제격이었을 것이다.
    • 바위를 깎아 새긴 마애불
  • 위로는 하늘길, 아래로는 물길

    파사성 - 국가 사적 제251호
    파란 하늘 아래 파사성

    인간의 구분을 알 리 없는 파사산은 여주시 대신면과 양평군 개군면의 경계에 자리 잡고 있다. 바로 앞에는 남한강의 물줄기인 여강이 지역을 가로질러 유유히 흐르고 있다. 이포보전망대에서 조망하는 이포보와 휘감아 도는 여강의 모습이 이리 호방한데, 파사산 정상의 파사성에서 내려다보는 풍광은 또 얼마나 장관일까? 남문 터 아래 파사성지 주차장으로부터 약 860m라는 푯말쯤이야 가벼이 지나친다.

    파사성은 고대 파사국의 옛터라는 설도 있고, 신라 파사왕(재위 80~112년) 때 쌓은 성이라는 말도 있지만 단지 이름이 같아 잘못 전해진 속설일 가능성이 크다. 파사왕 재위 시절 이곳은 버젓이 백제의 땅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성안에서 발견된 각종 유물이나 성을 쌓은 방식, 성문 형태 등에 비춰 신라 시대의 성으로 추정된다. 그렇다면 축성 시기는 신라가 한강 유역까지 진출한 6세기 중엽 무렵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충청 지역에서 경기와 서울로 향하는 주요 물길인 남한강과 한강 이남을 지키기 위한 전략적 요충지였기에 신라는 고역스럽게 산꼭대기까지 돌을 날라 성을 쌓았으리라. 사실 정상까지 그리 긴 거리는 아니지만 오르는 내내 경사 길이어서 차마 위는 올려다보지 못한 채 마른 숨만 가쁘게 내쉬었다. 그렇게 20분쯤 올랐을까? 파사성의 끝자락과 파란 하늘이 맞닿아 있는 모습이 그렇게 다행일 수 없다.

    • 파사성은 신라 파사왕 때 쌓은 성이라는 말이 있지만 파사왕 재위 시절 이곳은 백제의 땅이었기 때문에 잘못 전해진 속설일 가능성이 크다.
  • 눈앞에 펼쳐진 광활한 절경

    파사성의 늠름한 형상을 한눈에 담고자 한다면 이쯤에서 숨을 고를 겸 잠시 발을 멈추는 것이 좋다. 견고하게 쌓아 올린 널찍한 장방형 돌덩어리에 발을 올리는 순간, 폭 3.2~7.2m, 길이 936m의 성벽은 발아래로 낮아지기 때문이다. 천 년이 넘는 시간 동안, 그리고 그 시간에 버금갈 많은 이들의 무게에 마모돼 길든 돌들은 적들로부터 보호해주는 성벽에서 어느덧 사람들을 인도하고 나르는 길이 됐다. 그런데 그 길에 첫발을 디디는 순간 참으로 신기한 일이 벌어진다. 조금 전 목까지 차올랐던 거친 숨이 단번에 잦아들면서 ‘좋다’라는 감탄사로 바뀌기 때문이다. 눈앞에 펼쳐진 여강의 물줄기와 저 너머 보이는 무태산, 양자산, 주봉산의 광활한 절경 덕분이다.

    실로 파사성 위에서라면 양평으로 향하는 여강과 마을 진입로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것이 왜군의 침입을 감시하는 데 제격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파사성을 찾은 현대인에게는 잠시 사는 시름을 내려놓고 눈과 마음을 정화하는 아름다운 여주의 명소이다. 선조 23년 파사성 축성을 건의했다는 조선의 명재상 유성룡도 그 풍광에 감탄해 파사성 위에서 시 한 수를 읊었다고 하지 않는가.

    “파사성 위에 풀이 무성하고
    파사성 아래에는 물이 둥글게 굽어 돈다.
    봄바람은 날마다 끝없이 불어오고
    지는 꽃잎은 무수히도 성 모퉁이에 날린다”

    • 성벽 위를 걷다 보면 탁 트인 사방으로 보이는 여강과 여주 시내의 경관이 눈에 밟혀 걸음을 옮길 때마다 자꾸 뒤와 옆을 돌아보게 된다.

    파사성은 삼국시대에 처음 지어진 후 임진왜란 때 3년에 걸쳐 전체적인 모습을 갖추게 됐다. 현재 남아 있는 대부분은 조선시대에 다시 쌓은 것이다. 그러다 무너진 성벽을 여주시가 1997년부터 보수해 지금의 모습을 이루었다. 축성 이후 수차례 개축을 거치다 보니 옛 돌과 새 돌이 헐거운 구석 없이 단단히 엮여 있다. 그 사이사이 작은 틈새는 지난가을에 진 고엽들과 돌멩이들이 채우고 있어 더욱 견고하게 하나가 됐다. 애초 성벽이 될 돌이었을 리 만무하나 아귀가 척척 맞게 얽히고설켜 벽이자 길이 됐다.

    그렇게 돌길이 된 성벽 위를 걷고 있자니 탁 트인 사방으로 보이는 여강과 여주 시내의 경관이 눈에 밟혀 걸음을 옮길 때마다 자꾸 뒤와 옆을 돌아보게 된다. 그때 저 멀리 앞 산기슭에 작은 법당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궁금증은 잠시 뒤로 미루기로 하고 정상을 향해 길을 재촉하니 성벽의 촘촘한 돌들 사이에 사이좋게 뿌리를 내린 두 그루의 소나무가 보인다. 바로 파사성의 명물 ‘연인 소나무’다. 그 사이를 지나면 사랑이 이루어진다고 하는데 그 말의 진위를 따질 필요 없이 연인들은 사진을 찍는다. 나무 앞에는 ‘여강길’이라는 표지판도 있다. 파사성 길은 여주시의 도보 여행길인 여강길 중 8코스에 속하는 길이기도 하다.

    눈앞에 펼쳐진 광활한 절경

    드디어 정상에 다다르자 성벽을 오르는 동안 동행이 됐던 사람들이 삼삼오오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얼떨결에 두 팀의 사진을 찍어줬다. 정상은 오르는 노고를 보상받는 곳이자 함께 기념하는 곳이다. 잠시 정상의 시간을 만끽할 터이다

    올라올 때는 남문 터를 통해 왔으니 동문 터로 내려가는 것이 좋겠으나 성벽 보수공사 중이어서 아직 다니지 못한다. 대신 반대편 마애약수터라는 팻말을 따라갔다. 아마도 오르는 중에 봤던 법당의 궁금증을 풀 수 있지 않을까 싶어 삐걱거리는 나무 계단을 조심히 내려갔다. 산길을 따라 200여m를 걸으니 많은 이들의 바람이 세심하게 쌓아 올린 돌탑이 보인다. 그리고 그 돌탑을 도니 드디어 법당이 모습을 드러냈다. 압권인 것은 뒤편 거대한 암석에 새겨진 마애불. 고려시대의 ‘양평 상자포리 마애여래입상’은 바위의 앞면을 깎아서 선으로 새긴 것으로 경기도 유형문화재 171호이다. 그 커다란 바위를 반듯하게 깎은 것도 대단하지만 그 위에 마애불을 새긴 불심은 헤아리기 어렵다.

    불현듯 유약하고 유한한 인간에게 돌의 견고함은 이래저래 쓰임이 참 많다는 생각이 든다. 앞으로도 오랜 시간 파사성을 찾은 사람들에게 안식을 전하리라는 믿음을 갖게 되는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 풍운원은 여주 최고의 애석인 여경수 씨의 사택 정원이다.
  • 사그라진 기억들이 풍화되는 곳

    풍운원
    바람과 구름이 노니는 정원

    돌이라면 파사성 성곽을 가득 메운 돌들을 원 없이 보았으리라. 그런데 그것이 또 그렇지 않았다. 여주 금사면 전북리에 가면 어디서도 볼 수 없는 돌의 대향연이 펼쳐진다. ‘풍운원’ 이라는 이름이 붙여진 이곳은 야외 전시장 같기도 하고 풍물을 모아놓은 박물관 같기도 한데, 상시 개방된 여주 최고의 애석인(愛石人) 여경수 씨의 사택 정원이다.

    처음에는 크기도 모양도 제각각인 돌들의 범상치 않은 집합이 마냥 신기하기만 하다. 한데 알고 보면 어느 돌 하나 나름의 사연을 품지 않은 것이 없다고 하니 발에 채는 돌부리 하나 허투루 보아 넘겨서는 안 될 일이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풍운원의 아치형 대문만 해도 양옆의 도리아식 기둥은 삼풍백화점 장식물이었고, 정문 밑에 있는 돌은 올림픽회관 분수대에서 나온 돌이며, 문 앞 계단은 4.19회관의 계단이었다고 한다. 또한 문 앞에 세워진 초(初)·심(心)·지(志)라는 글자가 새겨진 돌은 을지로에 있던 산업은행(구 척산은행) 정문에 있던 돌이다. 이렇게 저마다 온 곳은 모두 다르지만 절묘하게 어우러져 풍운원의 어엿한 입구가 됐다.

    이 밖에도 동숭동 옛 서울대학교 본관, 대원군의 별장인 석파정, 해방촌 이후락의 별장, 자유당 시절 부통령인 이기붕의 아들 이강국의 사랑채에서 가져온 주춧돌도 있다고 하니 가히 우리나라 근현대사가 한마당을 이루었다 할 만하다.

    • 수많은 돌의 대향연이 펼쳐져 있는 풍운원
    누군가의 기억을 품은 돌

    이렇게 돌이 기둥, 주춧돌, 계단 같은 건물을 짓는 재료로만 쓰이는 것은 아니다. 무언가를 기념하고 기리는 비석이나 동상으로도 많이 쓰인다. 아무리 단단한 돌이라도 풍파에 쓸리기 마련이건만 인간의 짧은 소견에서 보면 유구하기 그지없으리라. 그래서 마당에서는 어느 초중고 총동문회가 세웠다는 공적비부터 경기도 모 대학교의 식수 기념비, 윤동주의 서시가 새겨진 비석, 광복 70주년 기념비, 헌법의 서문과 ‘상국설매(霜菊雪梅)’라는 김영삼 전 대통령의 글귀가 새겨진 바위까지 다양한 기억을 품고 있는 비석들을 만날 수 있다. 그중에는 석각가이기도 한 여경수 씨가 직접 새긴 글귀들도 있다.

    한때는 권세와 위엄이 대단했을 텐데 인간의 변덕으로 쓰임을 잃으면 그냥 거추장스러운 돌덩이로 전락할 뿐이다. 철거되고 부서져 하루아침에 자리를 잃은 돌들을 하나둘 풍운원으로 거두기 시작한 것이 어느덧 이렇게 마당을 가득 채우게 됐으리라. 여경수 씨는 버려진 것들이 애틋해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사람이 틀림없다.

    어쩌면 대단한 사건이 기록된 비석들보다 사사로운 기억을 품은 돌이 더 많을지 모른다. 멧돌이나 절구, 다듬잇돌, 구유처럼 돌은 생활 속에서 유용하게 쓰이는 일이 더 많았기 때문이다. 풍운원에는 돌부처에 돌하르방, 그리고 돌탑과 돌다리까지 돌로 만들어져 앞에 ‘돌’ 자가 붙은 모든 것이 모여 있다. 여경수 씨가 ‘돌에 미친 사람’이라는 소리를 듣는 이유다.

    그런데 풍운원에는 돌만 있는 것이 아니다. 세상에 사연 있는 것이 어디 돌뿐이겠는가. 색이 바랜 곰 인형에, 이제 구닥다리가 된 비디오카메라, 어디서 온 건지 출처를 알 수 없는 왕소라와 옥외 소화전,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뻐꾸기시계 그리고 어찌해도 어울리기 어려운 에펠탑과 먼지를 뒤집어쓴 어느 해 크리스마스트리까지. 그러다 보니 한 발 한 발 내디딜 때마다 무엇을 만나게 되든 기상천외하다.

    • 이곳의 돌들은 모두 사연을 품고 있어 우리나라 근현대사가 한마당을 이루고 있다.
    기다림의 시간들

    마당 한편에는 깎이다 만 미완성의 사자상이 석장의 정을 기다리고 있다. 그리고 안쪽 길가에는 아직 쓰지 못한 돌들이 쌓여 있다. 풍운원 밖에서 마당에 들어올 제 차례를 기다리는 것이다. 그렇게 한참을 정지한 돌에 둘러싸여 있어서일까. 시간의 흐름이 돌처럼 굳은 듯하다. 그때 어디선가 귓가를 울리는 개울가의 물 흐르는 소리. 졸졸. 가늘지만 널찍한 바위를 쓸어내리며 물줄기가 흘러갔다. 시간이 다시 흐른다.

    • 버려진 것들이 애틋해 마당을 가득 채우게 됐다.